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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살린 바나나

아버지를 살게 해주고, 버티게 해준 고마운 이야기

by 추억바라기

'인생에서 바닥까지 내려갔다 온 적이 있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난 바닥을 보기는 했다고 말한다. 단지 바닥을 보기만 했다고. 하지만 내 아버지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 바닥을 딛은 경험이 있다고 얘기할 듯싶다. 아버지는 아니라고 하실 줄 몰라도 그땐 정말 아버지에겐 바닥이었지 싶다.


30여 년 전 월급 생활자였던 아버지는 처음으로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사업 수완도 좋았고, 당시에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로 작은 도시였지만 작지 않은 매출을 올리며 나름 큰 성공을 거두셨다. 하지만 그 큰 성공도 오랜 시간을 머물지 않았다. 10여 년을 철옹성같이 지켜오던 당신의 일과 사업장을 IMF라는 직격탄으로 모든 걸 잃었다. 평소 늦은 시간이 아니면 귀가할 일이 없던 당신의 집에서 그 후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으셨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베란다 밖만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었고, 걱정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식사하고, 화장실 가시는 일을 제외하고는 TV를 틀어놓고 먼 산을 보거나,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는 일이 전부였다. 가끔은 베란다에 계실 때엔 나쁜 생각을 할까 봐 어디 가지도 못하고 아버지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가 이렇게 모든 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건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과 10년을 넘게 일궈온 사업장이 하루아침에 남의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였다. 처참한 마음이셨을 것이고, 다시 일어나기가 어려울 만큼 힘드셨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몇 달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그렇게 재기를 위해 다시 시작했던 일이 여기저기 다니며 바나나를 파는 일이었다. 당시 난 등록금 문제도 있고, 집안이 걱정되어 학교를 휴학했다. 처음으로 노점 장사를 하시는 아버지가 걱정되어 그렇게 장사길에 동행했다. 주말에는 정동진에도 갔다가, 평일에는 대형마트가 없는 시골까지 내려가서 바나나를 팔고 올라오고는 했다. 그때만 해도 대형마트가 없던 시절이었고, 당연히 열대 과일도 자주 접할 일이 없었다. 그나마 조금 규모가 있는 동네에서도 바나나 가격은 지금 같이 싸지 않았기 때문에 트럭에서 파는 바나나는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었다.


아버지의 예상은 처음 한 달은 어느 정도 적중하는 듯했다. 당시 주말 장사로 하루에 50~60만 원 매출을 낼 때도 있었다. 평일에도 시골 곳곳을 돌며 아침 8시에 집을 나서면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몸이 고되고 힘들었지만 하루 벌어들인 지폐를 보면 고단했던 몸이 금새 회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우린 금방이라도 다시 자리 잡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희망은 두 달을 가지 못했다. 처음 한 달간은 하루에 보는 바나나 파는 차량이 많아야 2~3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 시간에도 여러 대를 볼 때가 많아졌다. 때로는 길을 사이로 마주 보고 장사를 하는 모습까지 연출되고는 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수입은 줄고, 심리적으로 압박이 올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매달 부채의 이자 압박에 시달렸던 아버지는 아마 바나나를 팔고서 다시 정상적인 삶을 기대하셨을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아버지는 많은 나이셨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으시기에는 당신의 책임감이 스스로를 용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몇 년간을 고민하셨고, 결국 하시던 바나나 장사를 포기하시고 새로운 일에 뛰어드셨다. 사업을 해보셨던 아버지의 경험과 새로운 일이 적성에 잘 맞아서인지 10여 년을 그 일로 가족들 생계를 꾸리셨다. 지금은 그 일을 하진 않지만 아버지가 생각하는 '아버지 홀로서기'를 여전히 실천하고 계신다.


수 년간의 바나나 장사가 아버지에게 가져다준 재산 증식 없었다. 하지만 당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던 아버지를 일어나게 해주고, 버티게 해준 것은 분명 바나나였다. 당시 집안에서 답답했던 마음과 주변 사람들 만나는 것을 지극히 기피했던 아버지셨다. 차를 타고 당신을 알아볼 사람이 없는 지역에 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장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는 희망을 준 것이 아닐까 싶다. 아버지와 바나나는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사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를 살 수 있게 해준 고마운 녀석임에는 틀림없다.


휴학하고 몇 달을 쫓아다니며 함께 장사하며 아버지의 웃는 모습을 여러차례 본 기억이 난다. 몇 달을 웃음을 잃고 사셨는데 그리 밝게 웃으시는 당신 모습에 어느 정도 걱정도 내려놓았던 것 같다. 그 당시 함께 바나나를 팔러 다닌 사실을 알고 있는 아내는 요즘도 마트에 가서 바나나를 고를 때면 나를 보고 묻곤 한다.


"철수 씨, 이 바나나 잘 익은건가? 맛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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