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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r 08. 2021

아내가 염색을 하면서 생긴 변화

아빠 내가 흰머리 뽑아줄까?

 "어머니~, 흰머리 뽑아줄까?"

 "아니, 딸. 괜찮아. 내일 염색할 거야"



아내와 난 비슷한 성향이나 외모도 있지만, 전혀 다른 대조적인 구석 또한 여러 곳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아내를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아내의 풍성한 머리숱이다. 물론 아내는 이 풍성한 머리숱이 늘 고민이기는 하지만. 난 이런 아내의 풍성한 머리숱과는 달리 머리숱이 없어도 너무 없다. 아내 머리의 한 줌밖에 되지 않을 머리카락의 양을 내 두상 전체에 폭넓게 뿌려놓았다고 생각하면 될 듯싶다. 비단 머리숱뿐만이 아니다. 아내 모발의 두께는 아주 두껍고 튼튼하지만 난 모발의 양뿐만 아니라 질조차 가난하기 그지없다. 가늘어도 너무 가늘다. 한마디로 머리에 관련된 콤플렉스는 모든 걸 가지고 늙어가는 중이다.


어렸을 때는 내 머리숱이 없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 정확히는 어릴 때는 그래도 봐줄 만큼의 숱은 있었던 걸로 내 앨범 속 사진이 기억한다. 군대에 갔을 때도 가끔 거울에 보이는 정수리의 뽀얀 살이 단순히 짧은 머리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다시 머리를 기르고 아내와 연애할 때까지만 해도 내게는 머리숱에 대한 고민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처음 머리숱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건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회사 선배와 업무로 대화를 하던 중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배는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 대리, 너 요즘 업무 스트레스가 너무 많은 거 아냐? 머리 위가 왜 이렇게 훤히 보이니?"

 "제가요? 저 탈모 없는데 무슨 말이세요. 제 머릿속이 보인다고요?"

 "내가 위에서 내려다봐서 그런지 너 머리숱이 많이 없어 보여. 속 보인다 그것도 훤히"

그 날 이후로 난 가끔씩 그런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이제는 세월이 지나서 그런지 그러려니 하면서 듣고 산다. 아직까지 탈모 관련 클리닉을 다니거나 치료를 받은 적은 없만 수년째 내 샴푸는 나머지 가족들과 다른 기능성을 사용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머릿속은 보이지만 머리를 심거나, 가발을 써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런 나와는 정반대로 아내는 많은 머리숱이 늘 고민이었다. 아내는 머리를 기르면 늘 같은 스타일을 고수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아내의 머리숱은 대체 불가하다. 미용실에 커트라도 함께 하러 가면 커트해서 잘린 머리가 늘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잘려나간 머리를 쓸어 담은 쓰레받기에 수북하게 쌓이는 아내의 머리카락은 누가 뭐래도 몇 사람이 잘라야 채워질 양이다. 이런 아내의 머리숱을 볼 때면 난 부러움을 넘어서 경외감까지 든다.


이런 아내의 머리에도 세월이 지나며 거스를 수 없는 변화가 생겼다. 바로 수년 전부터 흰머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머리숱이 많은 만큼 흰머리의 양도 만만치 않게 늘어났다. 예전 큰아이 때부터 얼마 전 둘째 아이까지 아내의 흰머리를 뽑아주는 일이 아이들에게는 효도이자 자신들을 위한 수익 창출의 기회였다. 흰머리가 많지 않던 예전에는 흰머리 찾는 일이 뽑는 일보다 어려워서 한 가닥당 10원씩 하면 몇 가닥을 뽑지 못하고 아이들은 지쳐버렸다. 나중에는 가격을 50원으로 올렸을 정도로 아이들을 다독이며, 구슬려 아내는 자신의 흰머리를 없앴다. 이렇게 아내의 흰머리가 늘면서 아이들의 수익도 함께 늘어갔다. 하지만 큰아이가 머리가 커가면서 이 아르바이트를 거부했고, 둘째의 독점체제가 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독점이 무서운 게 수요는 있는데 공급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쉽게 얘기해 가격 결정을 흰머리를 뽑아주는 딸아이가 조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딸, 엄마 흰머리 좀 뽑아줘"

 "알았어, 엄마. 근데 흰머리 뽑아주면 얼마 줄 건데"

 "얼마? 같은 가격이지. 한 가닥당 50원"

 "싫어 나 안 할래. 한 가닥당 100원으로 올려줘"

 "됐어, 됐어. 철수 씨 내 흰머리 뽑아줘요"

 "영희 씨, 그냥 지수가 뽑게 해요. 난 눈도 침침해져서 잘 뽑지도 못해"

 "거 봐요. 어머니. 내가 잘 뽑아줄게요"


그렇게 딸아이는 자신의 노동으로 흰머리를 뽑고서는 용돈 이외의 고수익을 창출해냈다. 아내는 아쉽기는 해도 야무진 딸아이의 손이 제대로 흰머리를 골라서 뽑아주니 더 이상 왈가왈부할 일은 없었다. 주말이면 거실은 아내의 풍성한 머리를 풀어놓고 딸아이가 족집게로 흰머리를 뽑는 그림이 종종 연출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서 아내의 흰머리는 지나가는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더 많이 늘어났다. 이런 변화로 얼마 전부터 아내는 염색을 시작했다. 염색을 하고 나면 뿌리까지는 아니어도 한 동안은 흰머리 걱정을 하지 않았고, 거울을 볼 때마다 흰머리로 걱정하던 아내의 얼굴도 더 이상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어머니~, 흰머리 뽑아줄까?"

 "아니, 딸. 괜찮아. 내일 염색할 거야"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 아빠~! 여기 누워봐요. 흰머리 싸게 뽑아줄게"

 "안돼, 딸. 안 그래도 없는 머리 뽑을게 어디 있다고. 아빠는 흰머리 한가닥도 너무 소중해"



딸아이는 그렇게 큰 노동 없이 고부가 가치 수익을 내던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다. 내가 머리숱만 많다면 한 가닥당 200원이라도 쳐주고 싶지만 내게는 너무도 아쉬운 머리카락이다. 딸아이는 아쉽겠지만 가끔씩 있었던 수익의 기회를 깔끔하게 잊어버려야 했다.




누군가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당연한 것들이 또 누군가에게는 가질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세상 살면서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은 우리 주변에 있어왔다.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누군가가 하는 일은 항상 부러울 수밖에 없다. 자기만족이 없는 삶이 길어지면서 갖고 있던 본연의 성격도 '네거티브(Negative)'적으로 바뀌고, 어떤 일에 성과를 이루더라도 이런 성격 탓에 불만족과 쓸데없는 자괴감은 더 깊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이런 불공평을 탓하기보다는 지금 자신이 가지고, 누릴 수 있는 삶과 자신이 이룰 수 있는 희망에 만족하는 삶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1등이 있으면 꼴찌가 있기 마련이고, 의사가 있으면 평범한 회사원도 있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부자이고, 능력자면 좋겠지만 지금까지 돌아가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그러지 못함을 누구나 잘 안다. 현재 자신이 이룰 수 있는 범위에서 행복을 찾고, 행복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더 현명하게 사는 법임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단지 그렇게 내려놓고,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난 부자도, 능력자도 아니다. 그냥 오십을 바라보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래서 난 지금이 행복하다.



조용한 오후 너무 졸려 거실 소파에서 낮잠을 자는 날이면 가끔 내 머리를 자꾸 손으로 골라내는 딸아이의 손길을 느낀다. 조금은 서늘한 느낌을 동반해서. '지수야, 아빠 흰머리 뽑지 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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