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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14. 2021

9급, 7급 공무원 모두 합격한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

자신이 정한 행복의 기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 있잖아




과거 중학교 때 단짝 같았던 친구가 있다. 중학교 1, 2학년 때까지만 해도 함께 어울리며 가깝게 지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 후 학급이 나뉘고, 우린 서로 다른 친구들과 어울렸다. 자연스레 예전 교감은 없어졌고, 지나가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 정도 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어갔다.


성인이 되고서 동생 친구 중에 그 친구의 동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동생과 친구 동생은 꾸준히 연락하는 사이여서 나이가 들어서도 가끔 그 친구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첫 직장을 어렵게 다닐 때 그 친구는 신문사에 입사해 조금 폼나고, 부러운 기자 생활을 했다. 시간이 지나 내가 결혼을 하고 조금은 박봉에 외벌이를 할 때, 그 친구는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일본으로 여행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동안 그 친구의 인생과 내 삶이 비교가 되기도 했고, 조금 자유롭게 사는 친구가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3~4년이 지났고, 동생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친구의 소식을 들었다. 2년이 넘는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와 공무원 시험을 봤다는 얘기였다. 시험 준비 1년여 만에 9급 지방 행정직 공무원에 턱 하니 붙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9급 행정직 공무원의 자리가 그다지 크게 부럽지 않았다. 공무원 월급이 박봉인걸 생각하며 직장 생활을 오륙 년 이상 해온 내 급여를 비교해 당장의 부러움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몇 달 후 동생은 물어보지도 않은 친구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친구 소식을 들은 난 다시 한번 부러움으로 친구의 삶과 내 삶을 저울질하게 되었다.


  "오빠, 홍성 오빠 9급 공무원 그만뒀데"

  "응? 왜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둬. 나이도 이제 30대 중반인고, 이직하기도 어려울 텐데"

  "그게 7급 행정직 시험 봤던 게 발표 났는데 합격해서 7급 행정직 공무원 발령받고 그만뒀데"

  ".... 아, 그래... 잘 됐네"


친구 일이었지만 막상 겪어보니 배도 아프고,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몇 년 동안 9급 공무원을 준비하다가 포기하는 있는데 친구는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한 번에 9급, 7급을 다 붙었다고 생각하니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이후 친구는 특별한 일없이 잘 사는지 동생으로부터 친구 소식은 한동안 듣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은 몇 년이 지났다.


어느 날 주말에 동생 내외가 집에 놀러 왔고 한동안 듣지 못했던 친구 소식을 동생에게서 다시 듣게 되었다. 안타깝고, 놀랄만한 소식을.


 "오빠, 홍성 오빠 소식 들었어?"

 "왜 또 이번에는 행정고시 붙은 거야?"

 "아, 모르는구나. 홍성 오빠 직장 그만뒀데. 많이 아파서"

 "엉? 어디가 얼마나 아픈데 그 멀쩡한 직장을 또 그만둬"

 "뭐 래더라. 암튼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가봐. 희귀병인데. 치료제도 없어서 오래 살기 어려울 거라고 그러더라"

 "무슨 소리야. 나이 마흔이 갓 넘은 녀석이 도대체 얼마나 안 좋은데"


동생에게 친구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설마'했다가 들으면서 정말 인생 참 기구하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참 행복해야 할 시간에 본인 몸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병세가 빨리 악화되고 있다고 했다. 친구 본인도 본인이지만 동생의 친구를 포함한 가족들이 더 힘이 들겠다 싶었다.


그동안 잠시나마 친구를 부러워하고, 마음 한편으로 배 아파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후 한 동안동생이 얘기해주지 않아도 친구 소식을 묻지 않았다. 들어서 좋을 소식이었으면 아마 동생이 먼저 얘기했을 텐데 따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건 크게 차도가 없거나,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서일 테다. 사람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른다지만 젊은 시절 자유로워 보이던 한 영혼이 이제는 바람 앞 촛불 신세라는 생각에 참으로 삶이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 내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해 이른 봄쯤에 내 어머니보다 먼저 친구는 아주 멀고 먼 나라로 떠났다.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난 참으로 운명이란 굴레가 가끔은 어긋나도 한참을 어긋나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처럼 운명이란 녀석이 조금은 부족하게 친구에게 주고, 조금은 천천히 데리고 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난 성인이 되면서부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겪지 않아도 될 힘든 일들이나, 상황들을 많이 맞닥뜨렸다. 그런 일들로 30대 중반까지 아버지를 원망도 해보고, 스스로도 책망하며 살았다. 너무도 철이 없었을 때 당했던 어려움이 성인이 되어서도 트라우마처럼 남아버렸다. 사춘기 때 풍요롭게 누렸던 혜택, 환경과 상황들이 당연히 내가 누려도 될 생활이라고 생각했었다. 십여 년을 누려왔던 내게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이런 빼앗긴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알게 모르게 친구의 상황들이 부럽게 느껴졌었다. 내게는 평범하지 않고, 특별하게 보였던 상황들이지만.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지금의 완전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행복'이라는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을 누릴 수도, 아니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일상을 지옥 같은 하루하루로 보낼 수도 있다. 난 늘 마음 한편에는 나보다 더 잘난 친구들, 지인들에 대한 부러움이 작은 불씨처럼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없는 나만의 행복의 가치를 채우고, 누리며 오늘을 살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든든하게 버텨오고, 웃을 수 있는 이유를. 나를 너무 사랑하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내 가족과의 삶이 너무 좋고,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삶의 가치에서 행복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 행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스스로를 천국으로 혹은 지옥으로 인도할 수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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