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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Sep 13. 2022

난 오십에 스타트업으로 출근합니다

스타트업에서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사님, 회사에서 'SE'는 뭐에 약자인가요? 시니어? 세일즈? 에이 설마 슈퍼인가요?"


얼마 전까지 전시회 준비로 한창 바쁜 날을 보냈다. 지난 회사들에서는 전시회 참가를 해도 전시회 초대되어서 오는 혹은 전시회에 방문하는 고객들 대상으로 제품을 소개하고, 고객 응대하기 위해 지원 나가는 게 전부였지만 이번엔 업무 성격이 조금 달랐다. 일부분이 아닌 전부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업무가 내게 주어졌다.


처음 전시회 참여 소식을 들었던 건 몇 달 전이었다. 영업 부서 동료가 미리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얘기를 할 때만 해도 지금 같은 큰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엔 여러 가지 다른 현업들이 많아서 당장 다가올 일도 아닌 전시회까지 신경 쓰거나, 걱정할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당시만 해도 전시회 담당 주 부서가 내가 맡은 본부가 아닌 영업본부였다. 그런 이유로 더 깊게 신경 쓰지 않고 지원 요청 오는 업무에 대해서 건건이 처리하면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시회를 두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상황이 변했다. 전시회 총괄을 담당했던 영업본부 담당자가 갑작스럽게 휴직을 했고, 재직 중인 회사가 크지 않은 스타트업 기업이라 지원 담당이었던 내게 화살 시위가 주어졌다. 예전 다니던 대기업이나 규모가 있는 중견기업에서는 해당 부서 결원이 생기더라도 인수, 인계를 통해 해당 업무는 담당 부서에서 진행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재직 중인 곳은 스타트업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영역에서 일을 하고 있고, 때로는 여러 가지 다른 업무 역량이 필요할 경우도 많다. 부담이 컸지만 회사 내에서는 선택지가 없었고, 내게도 새로운 도전이라는 설렘임이 있어서인지 크게 거부 의사 없이 업무를 받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넘어온 전시회 준비는 22년이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내 커리어에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처음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로 며칠을 고민했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것이 기획이었다. 전시회 부스를 '어떤 테마를 가지고 꾸밀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보여줘야 할까' 등의 고민을 시작하니 스토리보드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머릿속에 있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조금씩 가닥이 보이니 일은 일사천리까지는 아니어도 일사 백리 정도의 속도를 내며 급속도로 진행됐다.


난 브런치 작가의 타이틀에 어울릴 법한 회사 제품의 '캐치프레이즈' 문구들을 하나씩 채워갔다. 전시 부스 벽면을 빼곡히 채울 판넬 콘텐츠와 디자인부터 제품 카탈로그까지 처음엔 끝이 보이지 않았던 일들이 하나씩 마무리가 되어갔다. 3주가 넘는 시간을 머리 싸매고 뽑아낸 결과가 드디어 여기저기 전시 벽면을 채우며 빛을 냈고, 출력된 카탈로그는 영업들의 손을 빌어 많은 고객들에게 전달되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이런 뿌듯함마저 없었으면 허탈했을 마무리가 다행스럽게도 결과물로 태어나 고생한 낙이 생긴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이 전시회 준비에 몰두하던 어느 날 부서 내 기술팀 팀장이 내게 면담을 청했다.


 "이사님! 제 타이틀이 SE가 맞습니까?"

 "응 그럼 맞지?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묻는 거야?"

 "이사님이 얘기하는 SE의 풀네임이 뭔가요? 세일즈 엔지니어(Sales Engineer) 아닌가요?"

 "맞지. 우린 영업 관련 기술 지원하는 기술자잖아. 그 포지션에 맞게 일하고 있는데. 아냐?"


얼마 전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자신에게 주어진 'SE'라는 타이틀이 어떤 풀네임을 의미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당연히 부서에 사람을 채용할 때부터 부서의 롤을 기술영업이나, 영업 기술지원 부서를 고려하여 세팅한 것이라서 당연히 SE는 세일즈 엔지니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는 최근 부쩍 하는 일이 늘고, 늘어난 일의 양만큼 업무 내용도 워낙 다양해서 조금은 답답한 마음에 부서장인 내게 얘길 꺼낸 것이다. 동료는 농담 반 진담 반인 심정으로 요즘 'SE'의 'S'는 주로 세일즈 지원이 많지만, 어떤 때는 시니어 같다가도, 또 어떤 때는 시스템 같다가도, 어떤 때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같단다. 가끔은 그 'S'가 슈퍼(Super)의 의미가 아닐까 동료에게 얘기해 주고 싶다가도, 오히려 농담했다가 불만만 살까 봐 그 얘기는 입안에 잡아두곤 한다.


난 최근에 처음 해보는 업무들이 많다. 영업 관련 지원 업무부터 연구소 관리자, 제안서 작성, 솔루션 기획, 마케팅 업무와 이젠 전시회 기획부터 카탈로그 디자인까지. 무궁무진한 내 잠재력(?)에 가끔은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 지시하면 수행했던 과거의 업무 태도와는 다르게 최근에는 생생한 현장에서 하루하루가 늘 활동적이고, 능동적이다. 가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몰아붙이는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업무 부하도 심하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는 것만으로도 일 아침이 두렵지가 않다.

디자인과 부스 기획한 결과물

십 년 만에 이직을 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회사보다 작은 규모의 회사다. 소위 얘기하는 '스타트업'이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회사의 자체 개발 솔루션을 가지고 짧은 시간이지만 매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처음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었던 것은 회사였지만 그 회사를 선택한 건 나였다. 작아서 좋았고, 성장하고 있어서 기대가 다. 회사의 성장이 꼭 나의 성장처럼 느껴지곤 다. 느지막이 고생길이라고 얘기하는 주변 지인, 가족들이 많지만 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오늘을 보내며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작은 회사라서 가끔은 체계적이지 않은 부분 때문에 답답할 때도 많고, 너무도 많은 일들로 한숨이 절로 나올 때가 더러 있다. 정말 이 일도 내 몫인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많은 경험들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내게 이런 열정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스스로를 담금질할 수 있게 하고, 지금 내 나이에 일을 하며 흥미와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음을 오늘도 감사한다.


난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회사보다 작은 규모의 회사에 출근한다. 그래서 다양한 많은 일을 맡아서 한다. 그래서 회사에서 난 많은 걸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난 지금 회사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난 스타트업에 다니는 이제 곧 오십 살의 회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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