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도 '폭삭 속았수다'의 양관식이 있다
OTT를 보던 아내가 고개 돌려 자꾸 날 보며 웃는다.
"왜요? 내가 그렇게 좋아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게"
아내가 자꾸 보며 웃는 바람에 한창을 집중해서 보던 시선을 거두고 짓궂지 않을 정도로 말장난을 걸었다.
"드라마 속 박보검 보고 있으면 예전 오빠랑 닮은 것 같아서요. 그래서인지 우리 연애했던 시절이 자꾸 생각이 나네요. 외모는 말고요 크크"
왜 웃냐고 물었지만 아내 미소의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시절 아내에겐 내가 양관식이었다. 그래도 굳이 외모를 '콕' 찍어 현실을 상기시켜 주는 아내의 센스(?)에 연애 시절의 추억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요즘 가장 인기 많은 넷플릭스 OTT '폭삭 속았수다'를 보며 아내와 난 종종 과거를 회상한다. 시대 배경에 차이는 있었지만 작품 속 양관식은 우리 연애시절 딱 나를 떠오르게 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연애를 시작했고, 양가의 반대 속에서도 우리는 결혼으로 가족이 됐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엔 지방에서 일을 하던 아내와 떨어져 지내서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만큼 짧게 만나는 주말 시간이 우리에겐 너무도 소중했다. 지금 아들이 군복무하며 연애 중이지만 휴가나 면회 때 아들과 아들 여자친구 상봉만큼 그 시절 아내와 나도 만나는 시간이 행복했고, 헤어지는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긴 불황으로 아버지 사업장도 힘들어졌고, 집안 사정이 좋지 않으니 학교를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휴학을 하고 집에 내려와 있는 동안 아버지 일을 거들며 힘은 들었지만 아내를 늘 볼 수 있어서 한편으로는 너무 좋았다.
"아주머니, 파전 한 장만 따로 용기에 담아주세요"
아버지 사업장에서 밥을 해주는 아주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할 때면 늘 아내가 생각났다. 가게에서 밥은 제대로 먹을까 걱정도 됐고, 음식 가져다주는 핑계로 아내를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내 입에 맛있는 음식이 들어갈 때면 아내를 생각했고, 매번 '폭삭 속았수다'의 양관식(박보검)처럼 아내에게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폭삭 속았수다'의 3막에서는 애순이 딸 금명(아이유)이가 박영범(이준영)과의 결혼을 앞두고 박영범 모친의 모진 말로 상처를 받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아내는 눈물을 떨구면서 우리 연애시절이 더 생각난다고 했다. 아마도 결혼을 반대하며 아내에게 상처될 말을 했던 내 어머니가 생각나서 일테다. 내게 다 말은 안 했지만 그 시절 내 어머니는 박영범 모친만큼은 아니어도 아내에겐 꽤 벅찬 캐릭터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래도 오빤 착한 남편 했잖아"
작품 속 금명(아이유)이가 영범(이준영)에게 착한 아들 할지, 착한 남편 할지 선택하라는 대사에서 아내는 그래도 자신 편을 들어준 내 노고(?)를 인정했다. 아무렇지 않게 부모 의견에 반대하고, 거스르던 내가 아님을 아내도 잘 알기에 내 용기와 자신을 향한 진심을 알아줬다.
우여곡절 끝에 아내와 난 결혼했고, 결혼 이후에도 가끔은 어렵고 힘든 문제들이 생겼지만 결국 우린 양관식과 오애순처럼 잘 살고 있다. 비싼 차도 없고, 비싼 집에 살지도 않고, 내세울 명예도 없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했던 시간, 사랑하는 아이들, 빛나는 우리가 있어서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만 해도 나이 들어 죽는다면 누가 먼저 죽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난 늘 이렇게 답했다. 내가 먼저 가고 아내는 조금 더 살다왔으면 좋겠다고. 그때엔 아내가 세상에 없으면 너무 힘들 거라는 생각에 당연히 먼저 갈 거라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게 손잡고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꼭 순서를 정해야 한다면 아내가 먼저 갔으면 한다. 아내를 잘 보내고, 아내가 하늘에서 긴 시간 기다리지 않게 조금만 더 살다가 따라갔으면 한다.
예전엔 그저 내 외로움과 슬픔만을 생각했다. 혼자 남아있을 아내의 외로움과 슬픔을 배려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며 곁에 있는 사람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 더욱 크게 깨닫는다. 우리의 지나온 시간이, 앞으로의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이가 들며 더 깊이 느낀다. 그래서 더욱 오늘을 살아가는 함께하는 아내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십 년 뒤에도, 이십 년 뒤에도 꼭 이 말만은 하고 싶다.
"영희 씨, 폭삭 속았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