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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꼼땅꼼 Sep 21. 2024

소녀처럼 반짝인 엄마, 딸기바나나 주스

내 인생 메뉴 <음료> 편


시골에 계신 엄마는 심장 부정맥과 갑상선암 등의 수술을 받으시면서 서울에 있는 병원 출입이 잦으셨다.

아무리 KTX가 생겨 예전에 비해 빨라졌다 해도 기차를 타고 오가는 당일치기 일정은 허리와 다리가 무척 아팠을 터.

그렇지만 그런 날이 농사일에서 손을 뗄 수 있었을 테다. (다음 날엔 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결혼 전 나와 동생은 함께 자취를 했다. 우리는 시골에서 올라와 살 집이 없는 미혼여성을 지원하는 아파트에 거주했기에 외부인의 출입은 철저히 금지되었다.(고등학교 때의 기숙사와 다름없었다)

나는 서울시청 인근의 건물에서 근무했었고, 동생은 용산역 근처.

그래서 엄마가 병원 검사나 진료로 서울에 오시는 날이면 휴가나 반차, 외출 등으로 서로 일정을 조정해 엄마와 병원에 동행하곤 했다.  


그날은 내가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온 날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퇴근하는 동생이 합류해 용산역에서 셋이서 저녁식사를 한 후 엄마 기차 타는 걸 배웅하기로 약속했었다.


이런, 집 열쇠를 두고 나왔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나와 2호선 전철을 타고 서울시청역에 내려서 근처에 있는 회사에 잠시 들러야 했다.

대로변에 있는 벤치에 엄마를 앉힌 나는 서둘러 길가에 있는 매대로 뛰어갔다.


(이미지 출처) Pixabay


"딸기바나나 주스 한 잔 주세요."


믹서기에 껍질을 벗겨진 바나나 하나와 딸기 몇 개가 담기고 아마도 액상과당이었을 것이 휘휘 뿌려졌다. 뚜껑이 닫힌 믹서기는 심한 소음을 내며 곧 한 잔의 분홍빛 딸바주스를 만들어냈다.


일회용 컵에 담긴 딸바주스를 엄마께 안겨주고 사무실로 뛰어간 나.

그런 나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있던 엄마는, 회사 건물 앞에 있는 분수대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분수의 물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싶어서 한참을 지켜보다가 이내 다가갔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Pixabay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뻗어 투명관인 듯 물인 듯한 그것에 손가락을 갖다 댔단다. 손가락에 닿아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아무런 유리관 같은 것도 없는데 저리 일목요연한 모습으로 포물선을 그리는 분수대가 신기했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날 사무실에 들어가며 서둘러 품에 안겨드렸던 과일주스가 그렇게 맛있었을 수가 없다고, 태어나 그렇게 맛있는 음료는 처음이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만 해도 커피를 못 마시는 내가 종종 마시던 거라 별다른 고민 없이 엄마께도 그걸 사드렸을 것인데.


 




결혼하기도 전의 일이라 족히 15년 이상 됐을 그날의 일이 엄마는 지금도 선명하다고, 최근 병원 다녀가시는 길에 다시 말씀하셨다.


내 기억에선 휘발된, 그저 지나간 그날의 일이, 엄마에게는 태어나 가장 맛있는 과일주스로, 신기한 분수로 기억되신 모양이다.


이후로도 엄마는 대장암, 그리고 폐암 수술을 받으셨다.

다가오는 12월이면 폐암 수술 5년 차라 완치 판정을 기다리고 계신다.

이제는 내가 서울에 살고 있지 않고, 동생도 태국 거주.

전처럼 엄마의 병원 진료에 동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가끔 함께 가는 날이면 언젠가 말씀하셨던 게 떠올라 나는 용산역에서 꼭 딸기바나나 주스를 사드리곤 한다.


"그때만큼 맛은 안 나는데, 딸기바나나 주스 참 달다."

 

딸기바나나 주스의 기억은 그렇게 매번 재생된다.

그리고 딸기바나나 주스를 얘기할 때면, 나는 실제로 보지도 않았으면서 15여 년 전 그날, 호기심 많은 우리 엄마가 포물선을 그리는 분수에 손가락을 내미는, 반짝반짝 눈빛의 소녀가 자연스레 그려진다.


그렇게 나만 아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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