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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yers Oct 27. 2019

건축가의 성지순례 2.

롱샹 성당 (2) Ronchamp, Notre Dame du Haut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걸작 롱샹 성당은 찾아가기도 힘든 프랑스의 시골마을 언덕에 위치해 있다. 원래 고대 로마군의 주둔지였는데 기독교가 자리 잡은 4세기 이후 성모 마리아의 순례지가 되었다고 한다. 13세기에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사람이 찾게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롱샹 성당은 르코르뷔지에를 만나 건축계에 충격을 던지며 완전히 새롭게 탄생했다. 중세시대나 지금이나,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누구나 마음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긴다. 그것이 종교적인 이유이든, 건축적인 이유이든.


담에 새겨놓은 역사유적지 표식. 프랑스 문화부는 롱샹 성당을 20세기 역사유적지로 선정했다.


롱샹에는 예배당 건물 외에도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두 개의 성당 부속 건물이 있다. 롱샹 성당으로 가는 길의 좌우에 각각 배치되어 있는 순례자 대피소(L’ Abri du Pèlerin)와 사제의 집(La Maison du Chapelain)이 그것이다. 언덕을 올라갈 때는 잘 몰랐는데,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독특한 굴뚝과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재밌는 것은, 내가 언덕 위 성당 마당에서 찍은 수많은 사진 중에는 이 건물들이 앵글 속에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도, 건축가 남편의 카메라에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정말 그랬다.


나에게는 없고, 그에게는 있는 순례자 대피소.


성당과 순례자 대피소의 간격.


 이 두 건물은 겉모습부터 롱샹 성당과는 많이 다르다. 성당은 곡선 위주지만, 부속 건물들은 모던한 직선이다. 여행 초반 파리에서 방문했던 르코르뷔지에의 다른 건축물들 – 특히 스위스 학생기숙사(Swiss Pavilion)와 브라질 학생 기숙사(Maison du Bresil)에서 보았던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콘크리트, 격자무늬 간유리, 콘크리트로 만든 테이블, 조금 튀는 듯한 페인트 색깔, 네모, 세모, 대각선의 기하학적 문양 같은 것들 말이다. 어떻게 보면 다른 건축물들에 비해 롱샹 성당이 가장 이질적이었던 것 같다.



유리에 붙여놓은 “세계의 침대 Crèches du Monde”라는 안내문이 이곳이 순례자의 숙소임을 알게 해 준다.

페인트는 다시 칠하면 늘 새 건물처럼 관리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다른 건물에서도 자주 보이던 격자무늬의 간유리가 군데군데 사용되었다.


순례자 대피소 주변의 자잘한 자갈을 박아서 만든 콘크리트 바닥. 하얀 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자갈이 만들어낸 무늬가 아기자기하다.


순례자의 성당인 롱샹 성당은, 이를테면 나그네들의 성당인 셈이다. 그래서 긴 여행을 하는 순례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숙소가 필요했다. 창문에 프린트해서 붙여 놓은 “세계의 침대(Crèches du Monde)라는 글자를 보니 지금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유리 너머로 비쳐 보이는 내부의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건물 앞 탁자에 앉아 저 너머를 바라보았을 중세시대 순례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언덕에 싱그러움이 가득한 봄이나 여름에, 이곳에 앉아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신의 축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눈에 폭 덮인 겨울도 충분했지만.


순례자 대피소 앞은 전망이 탁 트여서 롱샹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길 건너편에 있는 사제의 집은 처음엔 혹시 창고인가, 했다. 지하로 들어가는 셔터문 때문이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차고 입구였다. 르코르뷔지에는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는 시기를 살았고, 롱샹 성당이 지어진 1955년은 이미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한 지 40년이 지난 후였던 것이다.


 
2017년 한국에서 열린 르코르뷔지에의 전시장에 설치되었던 지중해의 오두막집을 제외하면, 사제의 집은 내가 본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 중엔 가장 작은 규모이다. 그래서인지 종교적인 엄숙함보다는,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었다.


문 위에 붙어있는 예쁜 타일에는 라틴어로 PAX et BONUM (Peace and Good)이라고 적혀 있다.


순례자 대피소와 같은 콘크리트 외벽의 둥근 무늬는 마치 나무집처럼 보이게 한다. 기분 좋은 파란색 창틀과 문, 문 위에 붙여놓은 타일, 심지어 지붕 위의 마른풀마저 하트 모양이다. 열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담아 슬그머니 손잡이를 돌려보게 만든다.


내려오다가 뒤돌아보니 두 건물 모두 아까 못 본 게 믿기지 않는다. 이렇게 눈에 띄는데 보지 못했다니.


몸을 녹이기 위해 다시 입구의 게이트하우스(Gatehouse)로 돌아왔다. 한 시간 전부터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었던 나는 카페를 찾아 직진한다. 그런데 로비에 가득한 의자와 테이블이 무색하게 휑하니, 자판기 한 대뿐이다. 분명 1.50€라고 적혀 있는데, 커피도 잔돈도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 기계치는 자기 탓을 한다. 아, 뭔가 엉뚱한 걸 눌렀나? 한참 동안 혼자 자판기와 사투를 벌이는데 건축가 남편은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롱샹 성당의 건축과 가톨릭 관련된 책과 기념품을 파는 가게의 서적 코너에서 망부석이 된 탓이다. 방문객이 없어서인지 딱 한 명 있던 직원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다시 자판기 앞으로 돌아와 이걸 때려야 하나, 전원을 꺼버릴까, 하며 이것저것 건드리는데 갑자기 커피가 나왔다. 잔돈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처음에 버튼을 좀 더 꾹 눌렀어야 하는 것이었을까? 아직도 풀리지 않은 혼자만의 미스터리다.
 
그래도 따뜻한 게 몸 안으로 들어오니 살 것 같다. 설탕도 두 봉지나 털어 넣었다. 그제야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겨울바람이 부는 바깥과는 달리 햇빛을 가득 머금은 안은 살짝 덥다.


다시 돌아온 게이트하우스. 입장권을 살 때는 빨간 의자 너머의 정문으로 들어가고, 측면으로 난 문을 이용해 롱샹 성당으로 올라가야 한다.
입구로 들어서면 매표소를 중심으로 카페와 기념품 가게가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매표소에서 카페 쪽을 바라본 모습.
시원한 전망과 햇빛이 좋았던 카페에서 바라본 모습. 문제의 자판기가 보인다!
기념품 가게. 유리에 붙여놓은 것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들을 소개한 종이다.

 
노출 콘크리트와 나무로 마감된 게이트하우스 실내는 화려하진 않지만 아늑하고 편안했다. 정면은 모두 창이라, 경사지에 쑥 들어가 있는 단층 건물이 답답하지 않고 바깥 풍경과 햇빛을 끌어들인다. 가운데에 있는 모던한 벽난로를 중심으로 한쪽은 카페, 한쪽은 기념품 가게 겸 매표소다.
 
벽난로 앞에는 르코르뷔지에가 롱샹 성당의 준공식 때 했다는 말을 적어 놓았다. 롱샹 성당 모형도 있다. 모던한 벽난로도 르코르뷔지에가 시작했다고 하던데 이 벽난로 앞이 롱샹 성당을 설계한 르코르뷔지에를 기념하는 공간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정면의 창문들도 괜히 르코르뷔지에의 좁고 긴 세로 창들을 생각나게 한다. 진실은 만든 사람만이 알고 있겠지만.



만든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화장실까지 꼼꼼하게 살핀 것 같다. 화장실의 세로로 긴 타일은, 건물의 인상을 좌우하는 정면의 유리창 모양에 맞춘 것 같다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하긴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인 롱샹 성당의 부속건물의 설계를 아무나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뜻한 노란 타일이 기분 좋았던 화장실


 
“이 건물, 렌조 피아노(Renzo Piano) 거야.”
 
런던 더 샤드의 렌조 피아노? 바젤 바이엘러 미술관의 렌조 피아노? 누구인지를 알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앞으로는 건축가 남편이 중요한 정보는 좀 일찍 알려줬으면 좋겠다. 나도 알고 보면 더 좋지 않겠는가!
 
2009년부터 클레어 수녀회(St. Clare)가 롱샹 성당을 맡게 되었는데, 수녀원 건물(Monastery)과 게이트하우스(Gatehouse. the tourist entrance pavilion)를 렌조 피아노가 설계했다. 이 건물들은 롱샹 성당 언덕의 경사에 끼워 넣은 것처럼 만들어졌다. 다른 계절의 사진을 찾아보니 잔디 언덕에 건물들이 쏙 들어가 있는 모습이 텔레토비 동산도 떠올리게 한다.


언덕 기슭에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건물들. 맨 앞이 게이트하우스, 왼쪽이 수녀원이다. 이미지 출처는 롱샹 성당 홈페이지 www.collinenotredameduhaut.com



 벽들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면 롱샹 성당의 관문인 게이트하우스에 이른다. 긴 벽에 가려 보이지 않는 왼쪽이 카페, 오른쪽이 숍과 롱샹 성당으로 가는 출입구이다.


그러고 보니 게이트하우스 앞마당에 세워둔 콘크리트 벽들도 예사롭지 않다. 안내판의 역할도 하면서, 문 없는 문이 되어 건물들을 구분지어 주기도 한다. 담장 같기도 하고, 기념비 같기도 하다. 눈이 녹으면 이 벽들이 만든 길이 겨울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줄 것이다.



 왼쪽 언덕 위의 수녀원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본다. 정면이 모두 창인 덕분에 안이 들여다보여서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사적인 공간에 허락 없이 침범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나중에 찾아보니 수녀원의 예배당 안에까지 들어가 본 사람도 있던데, 한 번 물어보기라도 할 걸 그랬다. 여행자의 용기는 이럴 때 필요한 거였는데!


수녀원 입구


살짝 들어가 본 수녀원 내부 모습. 게스트 룸으로 가는 계단과 수녀원 도서관의 작은 스터디 룸과 복도.


수녀원의 예배당 내부. 롱샹 성당은 너무 추운데 수녀님들이 여기에서 미사를 드리니 다행이다. 이미지는 롱샹 성당 홈페이지 www.collinenotredameduhaut.com


렌조 피아노는 르코르뷔지에의 걸작과 함께 남을 이 건물들을 설계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르코르뷔지에는 자신의 작품 아래 자리 잡은 렌조 피아노의 건물들이 마음에 들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들의 생각은 알 길이 없지만 이건 분명하다. 두 거장이 남겨 놓은 그곳의 빛, 그곳의 온기와 감각들을 즐기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1959년 롱샹 성당을 방문한 르코르뷔지에는 “이곳을 찾은 모든 분들 덕분에, 나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Thanks to you all users, I am rewarded)”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시아에서 온 작은 여자가 눈 반짝이며 남긴 발걸음과 시간도 르코르뷔지에와 렌조 피아노 두 거장에게 작은 기쁨이길 바란다.



<롱샹성당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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