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PROSCIUTTERIA
늦은 밤, 캐리어를 끌고 로마의 울퉁불퉁한 길을 헤맸다. 분명 여기에 호텔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13시간의 비행에, 버스에, 캐리어에, 이쯤이면 나와야 할 호텔이 안 나오니 어깨가 슬슬 굳어갔다. 괜찮다고 위로하며 곧 숙소를 찾을 거라고 말하는 메이트의 표정도 조금씩 굳어가는 듯하다. 조바심이 나던 찰나 호텔을 찾았고, 짐을 잽싸게 풀었다. 로마에서는 2박 3일 있을 예정이었는데 이대로 잔다면 1박이 날아가는 셈이다. 그럴 순 없지.
가장 가까운 명소는 트레비 분수였다. 몇 년 전 트레비 분수에 던졌던 동전의 기운이 온 것일까. 다시 로마에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기념사진을 몇 방 때리고 음식점을 찾아 헤맸다. 시시콜콜한 곳은 가고 싶지 않았다. 와인에 생햄, 그리고 치즈까지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로컬 로컬 로컬병에 걸린 나의 픽은 라프로슈테리아.
꿈에도 그리는 La prosciutteria.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정중히 물어보고 찍은 입구 사진. 트레비의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라프로슈테리아는 낮엔 샌드위치를 팔고, 밤에는 힙한 와인바로 변신한다. 실제 매장의 크기도 안이라고 더 크지 않다. 사진에 보이는 것보다 조금 깊을 뿐 많은 사람을 수용하지 못해 우리는 기다려야 했다. 생햄들이 줄줄 달려있는 인테리어에, 무심한 듯 가게 안 원목 의자까지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와인을 처음 접했던 것은 언제였을까. 사회 초년생이 되어 내가 돈을 벌고 쓸 수 있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첫 대학에서는 돈이 없는 대학생들이 부대찌개 하나와 두부김치를 두고 깡소주를 밤새 퍼마셨다. 술이란 이렇게 쓴맛인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쓴맛을 배워가는 것인가 생각했었다.
두 번째 대학에서는 성인이 된 후 용돈을 주지 않는 우리 집의 가풍에 따라 과외며 학교 수업이며 모든 것을 해내기가 매우 버거웠다. 그렇다고 술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집에서 한 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과외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막걸리 두 통을 사서 들어왔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팀플을 하며 막걸리에 빨대를 꽂아 마셨다. 막걸리는 가성비가 좋고 맛도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엄마는 차라리 밖에 나가서 마시라고 했지만 내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술을 포기할 법도 한데 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술을 택했다.
와인은 성인들의 술 같았다. 빈티지며 헤비 한 지 라이트 한 지, 왜 맛을 표현할 때 영어를 써야 하는지, 포도의 품종은 무엇인지, 지역은 어디인지. 일반 사람들이 접하기에 꽤 높은 장벽이 있는 술임은 틀림없다. 저런 것들을 모르면 와인을 마실 자격이 없는 것인지? 하물며 대형마트에서도 와인을 추천해주시는 분은 고객들에게 되묻는다.
-어떤 맛을 좋아하세요?
-헤비 한 것과 라이트 한 것 중 어떤 게 좋으신가요?
-안주는 어떤 걸 함께 드실 예정이신가요?
때때로 그냥 와인의 종류를 구경하고 싶은 나는 가게의 와인 추천자들과 하는 대화가 무서워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와인코너를 무심하게 지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곳은 달랐다. 이번 여행은 달랐다. 와인도 캐주얼하게 마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라프로슈테리아.
와인은 하우스 와인부터 진열된 와인 및 지역별 와인까지 매우 매우 다양했다. 눈치로 먹고사는 여행 메이트와 나는 빠른 속도로 주변에서 어떤 술을 먹고 있는지 스캔했다. 오, 오늘은 화이트 와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나라의 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레드와인은 고기, 화이트 와인은 해산물이라는 고정관념 안에 갇혀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곳에 와보니 화이트 와인도 많이 마시는구나. 안주가 생선이 아니어도 되는구나. 화이트 와인의 종류가 너무나 많아서 어떤 게 좋겠냐고 하니 '산 지미냐노' 지역 와인 어떠냐고 추천한다. 그럼 그걸로 먹어볼게요. 와인의 가격대는 바틀 기준으로 16~30유로여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참 재미있는 안내문이 있다. 이곳은 레스토랑으로 등록되어있지가 않아 주문을 받으러 갈 수도, 서빙을 해 줄 수도 없으니 직접 카운터로 와서 주문하고 스스로 자리를 찾아가라는 내용이다. 이 모든 것들이 비용을 더 절감해 주는 요인인가 보다. 주문한 와인은 병따개를 따서 잔과 함께 가져다준다.
와인바에 가면 술을 고르는 것부터 안주를 고르는 것 까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가격대만 고르면 되는 것. 1인당 5유로/10유로/15유로를 고르고 햄플레이트/치즈플레이트/믹스플레이트 고르기만 하면 정해진 메뉴로 가져다준다. 와인 플래터를 시키지 않은 사람은 없다. 늦은 밤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이었기에 인당 5유로짜리로 주문해보았다.
둘이 합해 10유로, 환산하면 13000원짜리 안주이다. 한국에 없는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멋진 플래터를 내어주다니 술이 안 들어갈 수가 없다. 트러플이 올려져 있는 브루스케타, 살라미, 멜론, 씨가 있는 올리브와 꿀에 절인 가지까지. 지중해를 찬양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탈리아는 참으로 축복받은 땅이구나. 추천해준 와인과의 마리아쥬는 내가 와인을 먹어 본 중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다.
여행 메이트는 이탈리아&스위스 여행에서 단연코 라프로슈테리아에서 마신 화이트 와인이 제일 맛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자기 마음대로 이태리가 제2의 고향이라며 중얼중얼거린다. 앞으로의 유럽여행에서도 이탈리아는 꼭 껴달라고 내게 부탁한다. 라프로슈테리아를 위해서라도 로마를 다시 방문할 것이다. 조만간, 빠른 시일 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