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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스토끼 Oct 18. 2019

움브리아의 아그리투리스모

Il melograno

현실을 떠나기 위해 출발한 여행


 결혼 직후부터 아가를 준비했던 우리에게 천사는 일 년이 넘도록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마음을 놓으면 올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매달 실패를 확인하는 과정은 잔인했다. 여행을 계획하면 아기가 올까 봐 몇 번의 여행 계획을 수수료까지 물어가며 취소했다. 


'과연 우리에게 아기가 오기는 할까?'


 살면서 하고자 마음먹은 것을 다 이룬 성취가는 아니지만 7-80프로의 그럭저럭 한 타율로 만들어 온 인생에 매달 실패를 쥐어주는 테스터기는 내 인생의 불청객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생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결론 없는 긴 터널 속에서 나는 많은 밤들을 울었다. 간혹 가다 들리는 지인들의 임신소식에 진심으로 축하할 수 없는 지경까지 도달한 나는 훌쩍 여행이 가고 싶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했다. 


 그러다가 이태리에 왔다. 여행을 하는 내내 마음이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혀 밑에 체온계를 넣고 기초체온을 재는 것이 아니라,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은 어떤 것을 할지 생각하는 하루였기 때문이다. 인공수정을 거쳐 시험관을 하는 과정에서도 이 여행이 큰 힘이 되었노라 감히 말할 수 있다. 


Agriturismo, 결국엔 민박 


결혼 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던 탓도 있고 여행 메이트에게 여러 곳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메뚜기처럼 매 숙소를 뛰어다녔다. 결론적으로는 좋았던 점도 있었지만 단점이 더 많았던 듯하다. 우리의 여행 스타일을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한 곳에 진득하니, 로컬처럼 유유자적하게'가 어울린다. 


옷을 입을 때는 TPO(Time, Place, Occasion)를 생각하듯 여행을 계획할 때에는 WHW(Who, How, Where) 누구와 어떻게 어디를 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물론 WHW는 내가 만들었다. 이번 여행은 나의 평생 여행 메이트와, 로컬처럼, 이태리 소도시를 다녀보기로. 준비 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이태리 남성 알베의 집을 가는 중 움브리아와 토스카나에서 아그리투리스모에서 숙박하는 것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아 이번엔 아그리투리스모다!'를 결심했다. 


아그리투리스모는 Agriculture+Tourism일까. 어원은 찾아보지 않았지만 농가에서 잠자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결국 무엇이겠는가. 우리네 민박과 하나 다를 것 없는 숙박의 형태였다. 호텔 물론 좋다. 하지만 이곳 토스카나와 움브리아에서는 호텔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고 현지 느낌을 받기 위해서는 민박만 한 게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1박은 아씨시 근처, 1박은 발도르챠평원, 1박은 끼안띠 지방. 누구든 이탈리아를 간다면 꼭 아그리투리스모를 권할 만큼 폭 빠져 돌아왔다. 



아기자기한 작은 도시 스펠로, 여행 메이트 뿔났다.  


민박집에 가면 다시는 안 나올 게 뻔한 우리의 습성을 알기에 로마에서 출발하여 소도시 한 곳을 들렀다 가기로 하였다.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이라는 책에 나온 아주 작고 예쁜 마을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면서도 종이조각 하나 찾아보기 어렵도록 깨끗한 보도블록에 감탄했다. 유럽에 여행을 오면 아쉬움이 항상 느껴진다. 우리나라도 여러 시대를 겪으며 유지된 꽤 오래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새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후대에 우리는 어떻게 비추어질까. 


이런 잡상을 뒤로하고 만난 골목에는 집에서 가꾸는 것이 분명할 화분들이 관광객을 반기고 있었다. 충분히 내리쬐는 태양이 있으니 집주인의 성실한 물 주기가 더해졌겠지?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도착한 에노테카.



이 작은 도시의 작은 에노테카에 온 동양인을 주인은 꽤나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자신이 나온 책을 내게 보여주며 한국에서 왔냐고 되물었다. 먼 곳에서의 손님을 반겨주며 와인을 이것저것 권하였다. 우리는 평소에도 만나기 어려운 지역 와인을 골라 달라고 했고, 아씨시의 화이트 와인을 추천받았다. 한 병은 킵, 한 병은 브루스케타와 같이 먹겠노라 얘기한 후 착석하였다. 로마의 라프로슈테리아에서 무지하게 감명받은 탓에 어디를 가든 무조건 화이트 와인이 함께했다. 


아씨시지역의 와인인 Tili는 우릴 실망시키지 않았다. 실은 나는 와인맛을 얘기하는 taste note에서 견과류 향이 난다든지, 초콜릿 맛이라든지 하는 평가들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동의를 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와인의 특색이 아주 뚜렷하지 않고서야 거의 다 비슷비슷한 맛 같기도 하구. 그래서 내게 이 와인이 어떤 맛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35도가 넘는 이탈리아에서 한 모금만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고 상큼함이 이루 말할 데 없어 또 생각나는 와인이야.'라고 대답하고 싶다. 



이 와중에 여행 메이트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나 보다. 남자 주인이 내게만 말을 걸고 마치 여행 메이트는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근슬쩍 어깨를 감싸려는 시도까지?! 누가 봐도 우리는 부부인데 참나. 이태리 남자들 자신감도 대단하고, 안하무인격의 행동도 거침없다. 남은 와인을 가지고 바로 아그리투리스모로 향하는 길. 



이태리 운전수를 조심하라. 


이태리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상했던 점은 1) 수동차가 유난히도 많았다는 것, 2) 에어컨을 옵션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오토매틱과 에어컨이 있는 것은 기본이었는데, 수동차가 현저하게 낮은 렌탈료로 유혹을 하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허나 메이트왈 '렌트는 오토매틱이야.' 거진 두배의 가격이지만 오토매틱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와, 이런 난폭한 운전수들 한국에서도 만나기 힘들 거다. 우리도 100km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데 1차선은 기본 시속 120~150km를 상회한다. 만약 1차선에서 어영부영하고 있으면 바로 차 뒤까지 쫓아와 빵빵거린다. 비키라고. 뭐하냐고.   


오 지쟈스. 나중에 알고 보니 1차선은 추월차로라 무조건 빨리 가야 한단다. 그 와중에 지나가는 차들을 보면 그 속도에 창문을 열고달린다. 이태리 운전수들 배포 한번 대단하다. 첫 아그리투리스모는 마치 우리네의 @@가든 같은 곳이었다. 꼬불꼬불한 도로를 달리고, 산기슭을 올라가면서도 우리가 잘 가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그런 길의 끝에 있었다. 



일 멜로그라노 민박은 알고 보니 맛집.


다시 한번 이 숙소를 잡은 나 칭찬해.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곳은 근처 주민들의 모임 장소였던 것이다. 다들 차를 끌고 와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런 곳. 아직도 메이트는 이곳에서 먹은 까르보나라가 인생 최고의 파스타였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직사광선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던 탓인지 더위를 먹어 술도 음식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꼬불꼬불 올라온 만큼 산의 위쪽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아랫마을이 훤하게 보였다. 



 우리는 저녁에 많이 먹지도 않아 각 코스를 한 접시 씩만 시켰더니 의아해하더라.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한가. 그곳의 식사예절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는 우리 또한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호기롭게 피오렌티나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절반을 남겼다는 후문. 여행지에서는 술도 좋지만 컨디션 조절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 저녁이었다. 그런데 정말... 여름 이탈리아 참으로 더웠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이태리 냥이를 만났다. 우리나라 야옹이들은 사람을 보면 피하기 급급한데 이 녀석, 배를 까고 뒹굴기 시작한다.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없고, 되려 '이런 나를 안 예뻐 할 수 있겠어?'라는 태도다. 이태리와 스위스에서 만난 야옹이들 모두가 그랬다.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지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행복한 야옹이들. 이 야옹이들을 보니 유럽이 더 좋아졌다. 야옹이도 살기 좋은데 사람은 살기 얼마나 더 좋을까? 


 아침식사는 레스토랑 안쪽에서 할 수 있었고, 홈메이드 파이 10여 종이 대기하고 있었다. 라떼와 함께하는 농가민박의 조식은 매우 훌륭했고 손이 안 가는 음식이 하나 없었다. 치즈, 생햄, 파이가 기다리는 아침이라니. 게다가 저 숙소가 15만 원 남짓이라니! (뒷 숙소로 갈수록 더 저렴해진다.) 


성공적인 첫 농가민박을 뒤로하고 이튿날부터는 중부 이태리의 소도시를 구경하러 간다. 왠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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