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하고 나의 시간이 많아지니 한동안은 그 시간들을 어찌 보내야 할지 몰라서 잠과 TV 시청으로 채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처음 한 달은 그동안 긴장하고 살았던 15년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알 수 없는 잠이 몰려왔었다. 아들이 본가에 놀러 갔던 어떤 주말은 전날 12시에 잠들어 다음날 오후 8시에 일어난 적도 있었다.
결혼생활 내내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혼하고 난 후 긴장이 풀려서였던 건지 저녁 8시가 조금 넘으면 나도 모르고 고개가 뒤로 넘어가기도 했었다. 그 이후에 이어진 잠 못 자는 불면의 시간 동안 최대한 이혼을 곱씹지 않고 평소와 다르지 않게 생각하고자 노력했지만 나도 모르게 불안, 걱정으로 보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나는 많은 불안과 고민의 대부분을 다른 이와 나눌 수 없었다.
이혼하지 않은 친구들에겐 하릴없는 넋두리가 될 것 같아서...
부모님께는 그렇지 않아도 아리고 저리도록 아플 상처일 텐데 걱정까지 얹어드리고 싶지 않았다.
회사 친구들에겐 사내연애였던 까닭에 이혼을 쉽게 오픈할 수 없었기에 전남편의 안부를 물을 때마다 한 발짝 얼버무리며 물러서야 했다.
15년 동안 회사, 집만 반복했던 탓에 이렇다 할 인간관계도 없었다.
그나마 나를 가장 많이 알아주는 내 고등학교 친구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을 케어하고 남편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만나기조차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그 많은 고민과 불안은 오로지 나만의 몫이었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으며, 내가 책임지고 있는 나의 아들에겐 누구보다 의연한 엄마여야 했다.
머릿속에 복잡한 감정들과 건드리기만 해도 울어버리고 싶은 꽉 차 오른 눈물을 같이 나눠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서글펐었다.
그랬다.
이혼한 내게는 남자가 아닌 친구가 필요했다.
의미 없는 드라마 얘길 하면서 같이 욕하고, 나의 회사 동료들 흉에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고 , 횡설수설 늘어놓는 나의 감정선에도 절대로 지적하지 않고 들어줄 그런 친구가 필요했다.
왜 나에겐 그런 친구가 없을까? 자책도 하고 후회도 했지만 15년을 집 밖에는 몰랐던 내 탓이지. 나도 친구들을 제대로 챙기질 못했는데 이제야 내가 힘들다고 친구들에게 기대겠다니.. 나 참 이기적이구나 하는 생각이 뒤따르니 오히려 미안한 맘이 앞섰다.
이혼 한 지 2년 가까이 되어가는 지금은 그래도 친구가 제법 생겼다.
퇴근 후에 아들의 저녁을 챙겨주고 잠깐 짬을 내서 생맥주 한잔하면서 회사 상사, 동료 흉을 보면서 서로 잘났다고 우겨대는 회사 동료들도 생겼고,
가끔씩 전화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전남편의 작태를 같이 욕해주는 동네 친구도 생겼다.
이유 없이 집으로 맥주 두어 병을 사들고 와서 방바닥에 주저 앉아 신랑, 시댁흉을 보면서 한참을 웃고 떠드는 친구도 생겼다.
때가 되면 전화해서 "내가 아는 애 중엔 네가 최고 똑똑하고 멋지다"면서 엄지 세워 날 칭찬해주는 언니도 생겼다.
자주 만나진 못하지만 속내를 말해도 아무도 나쁘다 욕하지 않을 그런 친구들이 생겼다.
아들의 침대 매트리스가 곰팡이가 나서 매트리스 소독,살균을 맡겼어야 했는데 차도 없고 왕복 10만 원이라는 비용이 부담돼서 망설이는 내게
"내가 월요일 점심때 업체에 맡기고 올 테니까 ㅇㅇ가(회사 동생) 수요일 회사 쉬니까 가서 찾아오면 되지 몰 고민을 해. 니 아들이면 내 조카나 마찬가진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뭐 "라고 말해주는 회사 동료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같이 농구를 해줄 수 없어 속상해하는 나에게 "그렇지 않아도 신랑이 너네 아들이랑 농구하면 안 되냐고 묻던데 잘됐네. 같이 할 아들이 없다고 아들 좀 빌려달래~~"라고 말해주는 착한 내 동네 친구 덕에 부족한 아빠의 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이혼을 하면 그간의 인간관계와는 다른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나의 사람이라 믿었던 이들이 돌아서기도 하고, 잊고 지냈던 이들이 어깨를 두드려주기도 하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시작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다시 그 관계 속에서 용기를 얻고, 위로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