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의 한 문장이다. 수(數)적으로 불리한 전쟁에서 누구라도 포기하고 싶었을 상황. 조정은 물러나라 했고 주변 장수들도 낙담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단순한 용기만은 아니었다. 냉정한 현실 인식 위에 세운 전략, 끝까지 가보겠다는 의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이 있었다. 내게 이순신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가능성을 놓지 않는 ‘현실적 낙관주의자’의 표본처럼 다가온다.
나는 가만히 두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쪽으로 자꾸 흐른다. 이것이 내 머릿속에 오래도록 자리 잡은 자동 반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그 부정의 흐름을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하나가 안 되면 다 안 될 거라고 여기는 경향(과도한 일반화), 내 실수를 엄청난 실패로 여기면서 잘한 것은 별것 아니라고 넘기는 태도 (부정적 과장과 긍정의 축소) 등이 있다. 이런 부정적 사고 습관은 감정과 행동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또한 이런 부정적 사고는 뇌에 스트레스 호르몬을 과다 분비하며, 우울과 불안,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런 반복적인 부정적 사고 유형을 ‘인지 왜곡’으로 분류하며 열 가지로 구분한다.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내 생각들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뇌가 만들어내는 ‘반복적 패턴’ 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인식 덕분에 부정적인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사고 습관을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좋은 출발점이다. ‘나는 왜 지금 이렇게 반응하지?’ 하고 한 발짝 떨어져 보면 생각이 감정을 끌고 다니는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아차리는 순간 생각과 감정의 관계가 분명해진다. 감정은 스스로 생겨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생각이 불러오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되면, 그 생각하는 힘에서 조금 물러설 수 있다. 긍정적인 생각은 몸과 마음을 훨씬 가볍게 만든다. 같은 하루라도 더 잘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나 자신을 덜 몰아붙이게 된다. 주변 사람에게도 약간 더 따뜻해진다. 아무리 작아도 기쁜 일을 찾아내려는 태도는 하루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 놓기도 한다. 어릴 적 읽은 『폴리아나』 이야기가 떠오른다. 무슨 일이든 좋은 쪽으로 해석하는 ‘기쁨 찾기 게임’을 하던 그 소녀. 처음엔 유별나다 싶었는데, 그 ‘게임’이 침울한 마을 전체의 분위기를 바꾸는 걸 보며 어쩐지 감동하였다. 사소한 것에서라도 기쁨을 찾으려는 그 태도는 어른이 된 나에게도 여전히 신선하고 소중하다. 그래서 긍정을 습관처럼 연습하려 애쓴다. 기쁨의 감각은 연습할수록 예민해지고 깊어진다.
그렇다고 모든 걸 좋게만 볼 수는 없다. 불편한 감정과 직면해야 할 때가 있고 슬픔과 분노도 온전히 느껴야 지나갈 수 있다. 늘 밝게 웃기만 하면 어딘가 가짜 같고 위로받기보다 오히려 외면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폴리아나 증후군’이라는 말도 생겼다. 현실의 고통을 애써 부정하거나, 해결이 필요한 문제를 덮어두고 지나가고 모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초긍정의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긍정이 때로는 자기기만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긍정과 부정,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대신 그사이 어딘가에 머물고 싶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되 그 안에서 여전히 잘될 가능성을 놓지 않는 태도다. 심리학자 일레인 폭스는 이런 태도를 ‘현실적 낙관주의’라고 불렀다. 부정적인 정보도 기꺼이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도 의미와 희망을 찾아내려는 마음. 위험 요소를 인식하고, 실패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만 그런데도 끝까지 해보겠다는 자세.
그건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마음은 자주 흔들리고 생각은 여전히 제멋대로 흘러간다. 별일 아닌 일에도 무거운 상상을 덧붙이고 안 좋은 쪽으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런 흐름을 알아채면 일단 멈춰 본다. 지금 이 느낌이 어떤 생각에서 왔는지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문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뭘까?” 그러다 보면 어떤 날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게 되고 또 어떤 날은 억지로라도 커피를 내리거나 산책을 하면서 몸을 움직인다. 할 수 있는 일 하나라도 먼저 해낸다. 행동이 생각과 감정을 이끌 수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최악을 대비하되 최고의 결과를 기대한다. 그렇게 몸을 먼저 움직이면 어느 순간 생각과 감정도 따라오기 시작한다.
나는 늘 이순신처럼 단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물러서지도 않는다. 초긍정자 폴리아나처럼 늘 해맑게 웃을 순 없어도 작은 기쁨 하나쯤은 찾아내고 싶다. 그 둘 사이 어딘가 현실을 똑바로 보면서도 그 안에 남은 빛을 포기하지 않는 자리. 그게 나의 현실적 낙관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