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화원 곰배령에서 포기를 배우다
‘천상의 화원’이라 불리는 점봉산 곰배령으로 향했다. 반년 치 산행 계획표에 곰배령이 적혀 있는 걸 본 순간부터 설렜다. 왜 천상의 화원일까? 정상 부근에 야생화 꽃밭이 펼쳐져 있다는 설명만으로 충분했다. ‘천상의 화원’이라는 말에서 떠오른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백두산에서 마주친 야생화, 또 하나는 어릴 적 본 드라마 <천상의 화원 곰배령>이었다. 드라마 속 내용은 희미하지만, 그 말의 울림은 오래 남아 있다. 곰배령은 또 어떤가. 양희은 노래 속의 ‘한계령’도 있고 황동규 시인의 <미시령 부는 바람>의 ‘미시령’도 있지만, 단어의 리듬감으로는 단연 곰배령이 한 수 위다. 야생화 들판을 볼 기대감에 나는 설레었다.
곰배령에 가기 위해 버스를 전세했다. 집결 시간은 새벽 6시 40분. 모두 26명이 모여 서울 잠실을 예정대로 8시에 출발했다. 날씨는 받쳐주지 않아 부슬비가 뿌리며 을씨년스러웠다.
기상 예보는 오후부터 비였다. 이 정도 비 때문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산행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우리 산우회는 일기와 무관하게 직진하는 전통도 있다. 여차하면 우비를 입고, 우산을 들고 산행할 계획. 그런데 아뿔싸, 새벽 다섯 시부터 설치며 나오면서 스틱을 챙기느라 우산과 우비는 깜빡했다. 오, 이건 베테랑 산꾼으로서 치명적인 실수로군. 가져온 바람막이로 버텨 보기로 하고 큰비만 오지 않기를 바랐다. 날씨 요정을 자처한 윤 교수님도 속수무책인 듯했다.
새로 계약한 전세 버스는 쾌적했다. 기사님은 친절했고 입구 계단에 “좋은 인연입니다”라는 네온 문구가 기분을 좋게 했다. 아무렴, 좋은 산에, 좋은 사람들과 가는 것은 좋은 인연이 틀림없다. 새로 오신 회원과 준회원이 한 분씩 계셨다. 차창 밖의 5월의 연녹색 풍경은 부슬비와 어우러져 아름답고 아련했다.
"곰배골 500m"라고 쓰여 있는 바위가 있는 곳까지 버스가 올라갔다. 그곳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산행을 시작했다. 부슬비는 계속 내렸다. 다들 우비나 판초를 꺼내 입거나 우산을 꺼내 들었다. 나는 우비 대신 바람막이를 덧입었다. 달마산 같은 바위산은 아니었지만 이 산도 돌산이었다. “~악산”의 한 자락이니 당연. 지난달에 갔던 덕숭산이 거의 정상까지 계속 계단이 이어졌던 것과 대조되었다. 나는 청계산 같은 흙산이 좋다. 흙을 밟는 발아래 감촉이 좋다. 산행을 계속할수록 비는 더 거세졌고, 바닥은 몹시 미끄러워졌다.
쉼터를 지나 한참을 더 올라가던 중, 낙엽과 돌에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몸은 중심을 잡았지만, 마음이 흔들렸다. 몇 달 전 다쳤던 기억이 스쳤다. 이 비에, 이 미끄러운 길을 계속 오르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어렵게, 중도 하산을 결심했다. 나로서는 어려운 결정이었다. 지금 내가 활동하는 산우회와 함께한 산행 중, 중도 하산은 처음이었다. 산행 경험이 없었던 시절에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면서도 정상까지 갔다.
가던 길을 멈춘다는 건 어렵다. 몸보다 마음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산행도 그렇다.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개운함, 땀 흘린 보람, 탁 트인 전망은 보상처럼 따라온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계속 오르기보다는 돌아서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일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번 중도 포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일반적 의미의 ‘목표 포기’. 또 하나는 기대했던 천상의 화원을 못 본다는 아쉬움이었다.
나는 목표를 중간에 잘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때로는 목표설정 자체가 잘못됐을 수 있고, 그럴 땐 조정하거나 다시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살아가며 배웠다. 한 번 정한 목표를 무조건 끝까지 밀고 가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곰배령 정상 등반을 포기한 순간, 그런 삶의 지혜 하나가 떠올랐다. 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내 나름대로 해석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상 팀을 기다리는 동안, 예상 못 한 즐거움도 생겼다. 음식점 주인이 산에서 직접 캔 참나물을 팔고 있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그 맛은 시장의 참나물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미리 하산한 우리는 참나물을 맛보고, 사고, 커피와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드디어 정상 팀이 하산했다. 정상 근처부터는 바람이 워낙 세서 오래 머물 수 없었고, 야생화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천상의 화원, 곰배령, 1,164m”라 새겨진 정상 바위 옆에서 찍은 사진을 들고 왔다.
그럼에도 식물을 연구하는 신소재공학과 고 교수님은 올라가는 길에 여러 야생화를 발견하시고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사진과 함께 가져오셨다. 제2 쉼터에서 정상까지는 야생화밭이었다고 했다. 귀한 홀아비바람꽃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고. 야생화 이름은 그 꽃들만큼이나 정겹다. 노루귀, 노루삼, 괭이눈, 말발도리, 얼레지, 개별꽃, 숲개별꽃. 그중 몇몇은 아래쪽에도 피어 있었기에 나도 아주 못 본 것은 아니었다.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내려온 곳에는 위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게르마늄 온천의 노천탕. 비 내리는 숲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던 시간은 이 산행의 보너스였다. 식당의 두부전골과 더덕구이, 따뜻한 사람들의 말.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하루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오늘, 곰배령은 내게 포기의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괜찮게 사는 법, 행복해지는 또 하나의 길이었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7/23 (수), <나대로 꽃피우기>입니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