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없이 코로나19를 견디는 5세 스케줄
내 아이에게 영상 미디어 노출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네 살부터 영어 DVD만 허용했고, 다섯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집의 TV는 꺼져 있었다.
할머니들께서 아이를 봐주러 오셨을 땐 아마도 TV를 켜셨을 것 같다. 하지만 나와 남편이 있을 땐 아이 앞에서 절대 TV를 틀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각각 자신의 핸드폰으로만 TV를 시청했고 (드라마 속 잘 생긴 남주들을 큰 화면으로 못 보는 내 눈에게 미안해) 루테인을 아주 열심히 챙겨 먹었다. 이렇게 5년째 살아왔다.
코로나19로 어린이집 등원이 무기한 연기되고 나 역시 출근을 하지 않게 되면서 이 시스템은 굉장한 난관에 봉착했다. 다섯 살 외동아들과 하루 종일 함께 놀아주다보니 나만의 시간 확보가 너무 어려운거다.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들의 연속이었다.
도대체 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자투리시간들이 있을 거야, 시간이 없다고 푸념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내 24시간을 분석해보자. 사각지대에서 버려지고 있을 시간의 조각들을 찾아 나만의 시간으로 가치 있게 써보자!’
이런 원대한 계획아래, 어느 날 나의 하루를 수기로 적어보았다.
규칙은 단 하나. 최대한 꼼꼼하고 자세히 기록할 것. 식탁위에 A4지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올려두고 매 시간마다 한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다음은 그날의 기록이다.
오전7시 :
아이 기상. 아이 방에 가서 아이 껴안고 팔베개 해주고 딩굴딩굴하기. 그림 그려달라고 해서 거실로 나감. BGM으로 클래식 라디오 켬. 기상 직후 나의 심신의 안정을 위해 라디오로 클래식 듣기 시작한지 3일 째.
7시~8시 :
클래식 라디오 83.1에서 나오는 연주곡 2곡을 들으며 <배꼽괴물>과 <큰입장어>를 그려줌. 아이가 색칠을 하다가 갑자기 라디오를 막 두들기고 만져서 주파수가 맞춰지지 않음. 아무래도 망가진 것 같음. 급 짜증났으나 참음. <배꼽괴물>그림의 배꼽엔 단추를 붙여주고, <큰입장어> 그림엔 눈알을 붙여줌.
8시~9시 :
한글책 <배꼽괴물>과 <고릴라>를 읽어줌. 책 읽고 나서 하드스틱으로 한글 만들기 놀이 해봄. (한글쓰기는 싫어해서 빨대, 하드스틱등으로 한글 만들기 놀이하는 요즈음)
9시~10시 :
튼튼영어주니어 DVD 보며 우유+시리얼 먹음. 비트박스 장면이 나오자 아이가 엄마랑 같이 춤추고 싶다 함. 옷장에서 스냅백이랑 비니 꺼내 쓰고 함께 비트박스 춤 춰봄. 다리가 풀림.
10시~10시30분 :
영어책 <Vagetable Jungle> 읽어주고 책 내용 그대로 역할놀이 2번 반복해서 놀기. 갑자기 책에 나오는 브로콜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지금은 없다고 했더니 아이가 짜증냄.
10시30분~11시15분 :
브로콜리 대신 사과 찾아 깎아줌. 사과 먹으며 한글책 <바닷 속 물고기> <탐험대장 송사리> 읽어줌. 책 속에 나온 동물들 그림 그려달라고 해서 장구애비, 송사리, 이구아나 그려줌. (엄마가 그림 그려주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고 그 다음부터는 본인이 그리겠다고 약속. 이 그림만 그려주면 엄마에겐 엄마만의 공부 시간울 주겠다고 함. 희망이 생김.)
11시15분~11시30분 :
엄마랑 잠시 함께 누워 껴안고 있고 싶다고 해서 팔베개 해주고 누워 딩굴 거렸음. “엄마는 역시 포근하다~”라는 얘기를 들음.
11시30분~12시20분 :
드디어 오늘 처음 얻은 개인시간! 그러나 너무 배가 고픔. 아이도 배고프다고 함. 일단 점심을 먹고 뭐든 하기로 함. 냉동실에 있던 보리굴비 1마리를 반찬으로 함께 맛나게 먹음. 밥 먹는 동안 한글이야호 DVD <고기>, <누나> 2편을 함께 보았음.
12시20분~1시 :
밥먹고 나니 또 공룡 그림 그려 달라 함. 엄마의 그림은 마지막이라던 약속은 온데간데없고 “딱 하나만 더!”라는 생떼 부리기 시작. 결국 스피노사우르스를 엄청 크게 그려줌. 아이가 색을 잘 칠해서 “너~무 잘 칠했다, 역시 컬러감각이 좋아!” 라고 칭찬해 줬더니 또 삘 받았는지 티라노사우르스까지 그려 달라 함. 결국 티라노도 그려줌. 티라노사우르스도 색칠을 잘 해서 칭찬해줌. (다행히 더 그려달라고는 안함.) 냉동실에서 꺼내놓았던 무화과를 간식으로 줬더니 엄청 맛있어함. “무화과가 몸에 좋은거야~” 라고 알려줬더니 그럼 자기는 이거 먹고 코로나바이러스를 무찌를 거라 함. 기운이 없어서 더 이상 긴 애기 못해줌.
1시~2시 :
드디어 나의 자유 시간! 나는 원래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는데 침대는 절대 안 된다고 함. 자기 눈에 보이는 식탁에서 엄마 공부하라고 함. 결국 식탁에서 영문법 책 꺼내 봄. 그동안 아이는 혼자서 공룡 그림을 5개 그림. 중간 중간 계속 오려달라고 주문해서 공부의 흐름이 엄청 끊김. 영문법 2챕터 겨우 봄.
2시~3시 :
빵 먹고 싶다고 해서 빵 사러 나감. 정작 빵엔 관심 없고 편의점에서 장난감 2개 사달라고 떼써서 결국 사줌.
3시~4시 :
사가지고 온 장난감으로 함께 역할놀이 함. 당연히 내가 나쁜 놈. 연속 세 번 죽음. 세 번 다 다르게 죽느라 힘들었음.
4시~4시30분:
내셔널 지오그래픽키즈 한글책 <뱀>, <거미> 읽어줌.
아이 잠들때까지 끝까지 쓰고 싶었으나 지쳐 포기했다. 한 시간 마다 무언가를 적고 있는 엄마 때문에 아이가 점점 짜증을 내기도 했고, 역시나 저녁이후에도 낮과 다름없는 비슷한 패턴의 시간이 흘러갔다.
밤에 재 재워놓고 오늘의 일과를 주욱 훑어보는데 두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다섯 살 내 아이는 책과 그림을 참 좋아하는구나.
둘째, 나만의 시간은 정말 없구나.
데이터 분석은 끝났다.
다음날 나는 아이에게 TV를 허했다.
헬로카봇 애니메이션에 빠져서 이제 나를 전만큼 많이 찾지 않는 아이를 보며 과연 내가 잘 한 일일까 마음이 어지러울 때 그날의 A4용지를 꺼내본다. 그리고 나를 위로하며 다짐한다.
‘이렇게 생겨난 나만의 시간들이니까 허투루 쓰지 말고 더 소중히 사용하면 되는거야~’ 라고.
오늘 나는 그렇게 얻은 시간에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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