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직러의 두 번째 직장 찾기
익숙하지 않은 왼손
중요한 모임이나 행사에 초대받았을 때 마땅히 입을 옷이 없다면 어떻게 옷을 구매하는 편인가?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숍이 있다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어울리는 옷을 잘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방문해서 입어보고 색상, 재질, 사이즈가 내 핏에 맞는지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고 믿지 못하는 성격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입사 전까지 어떤 직장이 내 핏에 맞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채용 공고에 보이는 조건 외에 같이 일하는 동료, 업무 환경과 조직 문화, 업무 자율도와 성취감 등 내가 직장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특히 더 어렵게 느껴진다.
마케터로 제대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직을 결정했지만 어떤 회사에서, 어떤 직무를 맡아,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지 구체적인 목표 없이 퇴사했다. 이직할 회사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않고 퇴사하면 상황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여겨져 문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오른손잡이가 왼손을 쓰는 게 어색하고 서툴러 보이는 것이지 진짜 문제는 아니다. 경험 부족한 2년 차 마케터의 선택은 면접을 최대한 많이 보고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건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보지 않아서 서투른 것뿐이다.
뿌리내릴 수 있는 조건
늦게 시작한 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여행사 유럽팀에서 1인 마케터로 다양한 직무를 경험했지만 사수 없이 혼자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부족한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회사로 이직하고 싶었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업무 환경, 스타트업으로 입사를 지원했다.
<이직하고 싶은 직장의 조건>
마케팅 팀 구축 및 팀장이 있는 회사 : 전문성
관심 있는 분야의 직무 : 성장 가능성
자유로운 조직 문화 : 유연성
위치, 연봉, 복지 및 근무 조건 등 : 업무 환경
예전부터 눈여겨보던 유니콘 기업의 채용 공고를 보고 원서를 넣었는데 바로 면접 일정이 잡혔다. 2년의 짧은 경력에 비해 다양한 활동을 밀도 있게 해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채용공고에 적혀있던 주요 업무와 자격 요건을 토대로 해당 직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임을 어필하기 위해, 입사 후 어떻게 일할지 SNS 채널별 전략 리포트를 면접 당일 제출했다.
업무 계획 리포트를 검토 후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으며 면접관들이 꽤 만족하는 눈치였고 면접 종료 후 양해를 구하고 리포트를 가져갔다. 퇴사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재취업에 성공했다. 이대로 순항할 줄 알았는데 4개월 동안 3개 회사를 거쳐 5번째 합류한 스타트업에 마침내 뿌리내렸다.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러 곳의 회사를 더 거친 이유는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 있는 환경인지 직접 경험해 보길 원했다. 같이 일하는 팀과 동료, 담당하게 될 업무와 성장 가능성, 비즈니스 모델, 조직 문화, 근무 환경, 연봉 및 복지 등 종합적으로 따져보고 회사와 나의 적합도를 판단했다.
1) A회사
- O : 인지도 & 연봉과 복지
- X : 팀 분위기 & 직무 적합성
A회사는 유니콘 기업으로 네임밸류가 있는 회사였다. 부모님도 아시는 인지도가 있는 회사였으나 입사 2주 만에 퇴사를 결정했다. 신규 TF팀으로 몇 명 없는 팀원들의 개인플레이가 심했다. 창업 멤버라는 가장 오래된 팀원은 일에 너무 지쳐보였고, 팀장님이 시키는 것만 간신히 해내는 업무 루틴을 반복했다. 입사할 때 직무와 달리 다른 업무를 맡게 된 게 퇴사하는데 결정적이었다. 팀 바이 팀, 업무 선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2) B회사
- O : 성장 가능성
- X : 근무환경
성장 가능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걸 알게 되어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B대행사에 입사했다. 콘텐츠 퀄리티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 뛰어났으나 1년도 버티기 어려운 업무 강도였다. 매일 새벽에 택시 타고 집에 가는 게 일상인 직원들의 이야기와 잦은 퇴사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업무 강도가 높은 만큼 일을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겠지만 주니어에서 시니어까지 성장하면서 다닐 수 있는 장기적으로 다닐 수 있는 근무 환경을 원했다.
3) C회사
- O : 직무 적합성
- X : 조직문화
코로나 이후 관심 있게 지켜보던 C스타트업. 직무는 내가 잘 아는 분야라서 일 자체는 흥미로웠다. 하지만 회사 내 전문 인력이 한 명도 없는 창업 이후에 팀원이 늘지 않았던 회사라 체계가 없었다. 마케터가 아닌 팀원으로 회사의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팀을 맡고 있던 분의 횡포로 남아있던 직원도 퇴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포기했다.
4) D회사
- O : 팀 분위기와 동료
- X : 비즈니스 모델
5) E회사
- O : 성장 가능성 & 비즈니스 모델 + @
- X : 연봉 및 복지
시리즈 A 투자받고 성장하던 D스타트업. 팀 분위기와 동료들이 좋았던 회사였다. 특히 인사팀의 진심 어린 케어를 비롯해 복지도 좋았으나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로 인한 수익 구조가 아리송했다.
D회사 입사 5일 차에 E회사에서도 최종 합격 통지를 받았다.회사의 성장 가능성과 비즈니스 모델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는데 처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고민 중이었다.
인사팀에 상황을 이야기하고 연봉을 다시 제안드렸더니 10% 미만으로 인상 반영해 주셨고 HR에서 팀장님께 해당 이야기를 전달드렸는지 퇴근길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 메시지가 하나 왔다.
나와 꼭 같이 일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였는데 그의 진심이 보여서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어서와 스타트업은 처음이지
각 회사마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갖고 있기 마련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과락’이 있으면 안 된다. 좋은 점이 아무리 많아도 수용할 수 없는 나쁜 점 한 가지 때문에 입사를 꺼리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또 여러 가지 조건 중 포기할 수 없는 조건과 우선순위를 정해둬야 이직에 실패할 확률이 낮다는 걸 4개 회사를 거치면서 알게 되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마케터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성장 가능성이었고, 회사에 수익을 가져다 줄 비즈니스 모델, 그리고 함께 일할 동료들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회사에서 2년 6개월째 지금까지 몸 담고 있다.
요즘 스타트업에서는 1년에 1번 이직하면서 몸값 올리는 게 트렌드처럼 비춰지는데 애초에 내 목적은 달랐다. 신중하게 직장을 고른 이유는 한 직장에서 최소 3년 이상 일하면서 마케팅 일을 깊이있게, 타 부서와 협력하며 업무의 연결성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일단 물속에 뛰어들었으니 밖으로 헤엄쳐 나오는 상황은 내 몫이다. 그렇게 인생 첫 스타트업에서 마케터로 일하며 기존 업무 방식이 달라 해메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