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에게 그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두는 사유는 다양하다. 낮은 급여 수준, 상사나 동료와의 갈등, 조직에 비전이 보이지 않아서, 직무 불만족, 육아 전념, 번아웃, 질병으로 인한 치료 및 요양, 거주지 이전, 사업, 학업, 드물고 부러운 경우로는 경제적 자유 달성, 기타 등등. 인간의 마음과 삶의 복잡다단함 때문에 모호한 인과관계를 가진 하나 이상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거주지 이전으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게 되더라도 높은 급여 수준은 이를 감내하게 하고, 번아웃 때문에 일을 그만두지만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마음과 몸의 병으로 나타나 퇴사하는 것도 안타깝지만 꽤 흔한 경우다.
지난 한 해 단지 ‘갈등’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구성원이 단 네 명이던 부서에서 팀장님은 가을께 육아휴직, 나는 연말에 이동배치를 신청했고 남을 수밖에 없었던 동료직원은 올 초 퇴사했다. 부서를 공중분해 시키고도 끝나지 않았던 그 지난한 시간의 결과는 내가 퇴사를 결심한 뒤에 나타났다. 우리 조직에 유례없던 부서장 보직해임이었다. 15년 가까이 부서장을 하셨던 그분은 앞으로 5년 남짓 남은 퇴임 시까지 그 어떤 리더역할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퇴사 결정은 이 분과는 큰 상관이 없다. 하나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냐 아니냐 헷갈리니까 똑바로 말해보라고 해도 그럴 수 없다. 생각과 마음이란 원래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올해 초 전보 발령받은 직무는 조직문화와 인력의 육성 및 개발을 담당하는 HRD 팀의 성과 관리 업무였다. 사회적 경제와 개발협력 현장사업으로 시작해 정책옹호로 가장 오랜 경력을 쌓은 나는 어쩌다 감사실을 거쳐 인사부서까지 오게 되었을까. 왜 조직은 나를 이 업무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판단했을까. 전혀 다른 양상의 갈등이 시작되었고 지난 몇 달간 그 내적 갈등과 싸워야 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발령은 아니었다. 전사 대상의 업무를 진행하며 다양한 조직구성원과 의사소통 했던 경험, 조직 전반의 업무와 이슈에 관한 이해가 새로 맡은 업무에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했다. 내가 거쳐온 보직의 경로와 그를 통해 쌓아 온 역량을 간절히 원하는 직원들도 있지만 원한다고 쉽게 얻기 힘든 경험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수년간 많은 직원들을 힘들게 하고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리더에게 어떤 경고나 제재도 주지 못한 채 리더를 지원해야 하는 업무는 내가 맡은 일의 가치와 효용성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불러왔다. 내가 경험한 리더는 분명 리더십에 결정적인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기존의 역량평가 지표로는 그 결함을 발견하거나 제대로 평가할 수 없었다. 조직문화와 제도를 담당하는 부서에 있지만 실상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함이 나를 압도했다. 계속해서 앞으로 끌고 나가는 힘도 있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는 한 발짝도 걸어 나가기 힘들었다.
감사하게도 동료들은 심리적 외상이 있는 게 분명한 내 상황과 심경을 십분 이해해 주었다. 특히 팀장님은 벗어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하다며,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업무에 몰입할 수 있을 때까지 너무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파격적인 배려의 말씀까지 건네셨지만, 나는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스스로를 더 채근하게 되었다. 사람을 육성하고 계발하는 일에 다들 너무 진심인 동료들의 열심에 초를 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빨리 이 트랙 위에 올라타 함께 재미있게 일하고 싶었으니까. 이 일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인지 오류를 수정하고 싶어서 상담까지 예약하고 첫 회기를 기다리던 중에 조직 내 프로세스의 일환으로 다시 한번 전년도의 일을 복기할 일이 있었다. 잊어버리려 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꺼내어 조목조목 적어 내려가며 이런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다. 과연 내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이 일에 몰입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이 일을 하고 싶은 걸까?
발령받은 직후 많은 사람들이 ‘그 팀에 참 잘 어울린다’라는 말을 했다. 이 일을 잘할 역량이 내게 있다는 말도 여러 사람에게 들었고, 나 역시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엇보다 작년의 수렁에서 나를 건져내 준 팀과 보직이니까 이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게 직장과 일이란 단지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었기에, 내가 설계한 인생 경로에 전혀 없던 HR 직무를 맡은 것은 내 예상보다 큰 전환이었다. 어떻게든 내가 하던 목적사업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연속으로 지원 부서에서 커리어를 쌓다가 비영리 경영지원이라는 경력 경로로 이탈해 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내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이 전문 분야에 더 깊이 들어갈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분야에서 뒤늦게 열심을 내려면 흥미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일단 이 분야는 아니고, 이 조직에 있는 수십 개의 팀 중 하나로 다시 옮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찬찬히 내가 아는 업무들을 떠올려보았다. 경험과 논리가 뒤섞인 수많은 상상과 가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오갔고 수일 후, 놀랍게도 이 큰 조직에서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조직의 비전, 미션, 핵심가치에 너무나 동의하고, 세상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과 그 영향력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신뢰하고, 여기서 만난 좋은 사람들도 이렇게나 많은데, 안타깝게도 내가 열정을 가지고 재밌게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발견한 이상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하루에 8시간, 일주일에 40시간을 쓰는 일을 열정과 재미로 충만하게 하는 건 의식주만큼이나 중요하고, 그래서 시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다. 생각은 길었지만 저울질은 크지 않았다. 나는 관심사가 분명했으니까.
새 팀으로 발령받은 지 넉 달만에 퇴직하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전년도 일의 끝나지 않은 영향일 거라 쉽게 추측했다. ’ 사람 때문에 그만두지는 말아라’ ‘그 사람 때문에 좋은 직원들이 떠나가는 게 안타깝다’와 같은 말을 들으면 내 속을 뒤집어 까서 감정과 생각의 세밀한 얽힘까지 보여주며 설명하고 싶다. 물론 시작점에 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로 인해 내 동기와 열망을 진지하게 찾아볼 수 있었고 그건 적당히 만족하는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고. 그리고 이제 좀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떠난다고, 나는 그에게 그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상처받은 마음을 가지고 그것 때문에 떠나는 거라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다는 선배와 저녁을 먹으며 아주 신나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헤어지면서 선배는 마음이 너무 기쁘다며 어디에서 뭘 하든지 글은 계속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어디서든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축복의 말을 해주길래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에게 좋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래, 꼭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내 나를 아껴주었고 그래서 걱정해 주었던 모든 분들께 지금의 내 생각과 감정을 자세히 공유해서 조금이나마 마음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 안타까움이 아니라 기쁨과 소망으로 이별할 수 있도록 남은 일주일 간 더 열심히 찾아가 인사드리고 설명하고 싶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더 좋은 사람에 가까워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