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블 메이커에서 용감한 사람으로

구석에 숨어있던 자기 의심이 선배의 마지막 말에 다 녹아내려서

by 담쟁이

세 번째라 능숙하게 잘할 것만 같았지만 지난번 퇴사가 너무 오래전이라 모든 게 새롭다. 그중에서도 누구에게 먼저 소식을 전하고, 누구까지 전해야 하는지가 가장 어렵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직장이고 가장 규모도 큰 조직이었으니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게 당연한데 되지도 않는 노련한 척을 하고 싶은지 자꾸 괜찮은 척하다가 눈물이 툭툭 터지고 만다.


팔 년 전, 입사 면접을 마치고 집에 가려던 나를 붙잡아 점심을 사 주었던 선배가 있다. 같은 팀으로 일해본 적도 없지만 그 밥 한 끼에 담긴 사랑과 정으로 줄곧 치환되던 사람. 지방에 있는 그에게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 몰라 메신저로 퇴사를 전했는데 목소리라도 듣자며 퇴근 후 전화가 왔다.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다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차분하게 질문을 하고, 내 이야기를 듣고, 한참 통화를 하다 이제 마지막이다 싶을 때쯤 이런 말을 건넸다.


"모두 다 고만고만 엇비슷한 우리 같은 조직에서 다른 목소리를 가진 사람, 아니라고 말하고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너무 소중하고, 결국 우리 모두를 더 좋은 방향으로 가게 해 준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인사라고 할 때 무슨 말을 꼭 하고 싶냐면, 혜빈이 이 조직에 너무 필요한 사람이었고,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다고,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요. 내가 그 분과 일했던 그때 ‘당신이 틀렸다’라고,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라고 조금 더 직면도 하고 대들기도 했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이 열 개 중에 한 두 가지쯤 말할 때 나는 한 네댓 개를 말하고 있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혜빈은 일고 여덟 개를 말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걸 용감함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혜빈이 가진 그 용감함, 만약에 그걸 경매 같은 데서 판다고 하면 내가 정말로 높은 값을 주고 사고 싶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런데 갖고 싶은 거라서. 그러니까 행여나 본인이 이 조직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든가 내가 한 일이 맞았나 의심한다든가 혹여라도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절대, 절대로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


직장을 다니며 늘 이질감을 느꼈다. 숱한 검사들을 해봐도 언제나 논리와 평가, 전략적 사고 같은 부류가 강점으로 나오고, 그래서 따지고 논쟁하고, 멈추어 세워 ’ 잠깐만, 이거 아닌 거 같아 ‘라고 주저함 없이 말하는 나는 조직 내 어느 그룹에서나 많이 튀는 사람이었다. 성격이든 기질이든 강점이든 개인의 고유한 특성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게 당연한데도 몇몇 사람들에게 나는 ‘처음 보는 타입의 사람‘, ’(이) 조직생활 힘들어할 것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그런 선 긋는 말 한마디에 비주류가 될 때도 있었다. 그 이질감 속에서도 팔 년 넘게 자리를 지켰던 건 내 자존감이 튼튼하게 역할을 다해 준 덕분이었을 것이다.


사실 작년의 그 폭풍 속에 함께 있다가 지난달 퇴사한 동료와 이미 여러 번 말한 적이 있다. 그 오랜 시간 말없이 참고 견딘 사람들 탓에 우리가 다 뒤집어썼다고. 더 일찍 잡을 수 있었던 불을 수수방관했기 때문에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거라고. 그러니까 이 조직의 모든 사람들이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마땅하다고.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자기 의심이 있었나 보다. 미운 오리새끼 같고 청개구리 같은 내가 별 것도 아닌 일에 들고일어나 평지풍파를 일으킨 게 아닌가 하고. 십 년 이상 변함없다는 건 그 행동을 조직에서도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하고. 당연히 나보다 더 오래, 심한 일을 당한 직원들도 있을 텐데 그런 게 조직 적합성이 높은 사람은 아닐까 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고, 이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멈춘 뒤 보이지 않는 구석에 숨겨놓았던 자기 의심이 선배의 마지막 말에 다 녹아내려서 눈물콧물로 펑펑 쏟아졌다. 나를 용감하다고 말해준 선배의 그 말을 값있게 하기 위해서, 농담으로라도 나 스스로를 트러블 메이커라고 자조하지 않아야겠다 다짐했다. 언제나 용감했고 마지막까지 용감했던 내 모습만 남도록. 그래도 제 용감함은 안 팔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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