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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May 06. 2023

제 걱정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익숙한 것을 떠나는 데 따르는 두려움이 당연히 내게도 있다고

꽤 오래전의 일이다. 행글라이딩을 하면 하늘을 나는 기분이라 너무 신난다는 내 이야기를 듣던 지인이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뭐가 무서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서 되묻자 그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거잖아요. 만약에 날아오르지 못하면 그대로 추락일 텐데요.’라고 말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깨달음이었다. 몇 번의 비행을 하는 동안 왜 한 번도 그 생각을 못했을까 자문하다가 내가 찾은 답은 ‘날아오르는 걸 의심하지 않으니까 떨어질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였다. 직업이 임상심리사였던 그는 전문용어로 나 같은 사람을 ‘위험인지가 낮은 편’이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평균적인 사람들보다 두려움을 덜 느끼는 사람, 본인은 별로 비장하지 않은데도 남들 보기에 좀 더 겁 없고 가끔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사람.


퇴사일을 정해두고 잔여연차를 써야 하다 보니 출근할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나서 인사해야 할 사람들에게 바쁘게 연락을 하고, 아침 점심 저녁 계속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게 지난 며칠의 일과였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 중 절반은 다른 팀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한 명씩 따로 만날 시간은 도저히 없어서 내 송별 점심을 구실로 한자리에 모았다. 같이 일할 때는 대부분 싱글이었는데 이제는 육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게 신기하기도 하고 세월을 체감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더 이상 이 조직에서 하고 싶은 일은 찾지 못했고, 관심 있는 일이 분명하게 생겼다는 내 퇴사 사유를 듣고 몇몇은 ‘나도 그래’라며, 이대로 괜찮은지 불안하다고 했다. 조직에서 필요한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내 실력이나 경력이 제대로 쌓이는지에 관한 의문이자 회의였다. 고민하고 결단까지 내린 나의 용기가 부럽다는 그들의 말에 큰 결심은 담겨있지 않은 걸 알지만 어떤 뜻으로 하는 말인지 진심은 느껴졌다. 그렇지만 ‘이런 건 남편도 자식도 없는 자유로운 싱글의 특권이니까 함부로 따라 하지 말고 워킹맘 친화적인 이 직장에 딱 붙어 있어’라고 잘라 말했다.


나 자신 말고 책임질 어떤 사람이 있었다면 나도 다른 결정을 했을지 모르겠다. 월급 따박따박 나오고 연차 쌓일수록 조금이나마 급여가 올라가는 이 안정성에 올라타면, 웬만큼 못해먹을 사유가 없는 이상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할 기회를 갖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내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주어졌던 그 생각의 기회 덕분에 조직과 나의 관계를 성찰할 수 있었다. 우리의 주고받는 관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결론이었다.


인생의 한 때 나를 성장시키거나 기쁨을 주었던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고, 그 후에는 역할을 이어받을 무언가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게 연인이나 친구든 취미든 직장이든, 이 관계의 유효기간을 민감하게 모니터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건 용기라기보다는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한 지난 음식물처럼 썩어서 나에게 고통을 줄 테니까. 어쩌면 이미 최적의 시간을 지났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계속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정말 용기 있다거나 과단성 있는 사람이어서 다음 대책도 없이 떠나는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다. 익숙한 것을 떠나는 데 따르는 두려움이 당연히 내게도 있다고, 내가 위험인지가 낮은 사람이긴 하지만 이 선택에 따르는 위험과 어려움은 충분히 인지했다고. 하지만 머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위험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에 나를 뽑아 주었던 첫 팀장님은 한 시간 반의 이야기 끝에 핀잔주듯 말씀하셨다.


“어이구, 누가 말려. 자기 혼자 다 결정해 놓고. 그래도 걱정은 하나도 안된다.”


아니, 왜요! 제발 제 걱정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도 제가 엄청 걱정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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