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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쟁이 Jun 20. 2023

롱런의 롤모델은 필요 없어

언제 어디에서도 정말 괜찮은 사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기까지

연초 팀을 옮기고 격월간 사내 뉴스레터 발행 업무를 맡았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제작한 뉴스레터의 인터뷰 대상은 근속 33년 차 대선배 차장님이었다. 지금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하자면 대학 졸업할 즈음 지금의 직장 인턴에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나를 인터뷰했던 부서장님이 바로 지금의 차장님이셨다. 최종면접 후 똑 떨어진 나는 충격을 받고 관련 전공으로 대학원 진학을 했으니, 그 이후 돌고 돌아 이 기관에 입사하고 지금껏 일한 그 시작점에 계시는 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간 접점이 많지 않아서 거의 처음으로 독대하는 자리였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며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차장님을 인터뷰하는 구실은 지난 삼 년간 아프리카 파견지에서 수행한 사업 성과에 따른 장관상 수상이었다. 그러나 내가 여쭤보고 싶은 많은 질문은 그 상이 아니라 이 조직에서 지낸 시간과 역할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입사 연도가 비슷한 분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부서장이나 그에 준하는 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그 직책을 반납하고 정년이 한 자릿수로 남은 지금까지 현장에서 땀 흘리고 부대끼는 길을 택할 수 있는지, 그 선택으로 얻는 것과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터뷰 시간은 한 시간 반을 훌쩍 넘겼고, 나는 막바지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조직에서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요?”


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들어온 차장님은 명석하고 열정적인 동시에 자기주장과 호불호가 분명하고, 표현에 거침없는 분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점 때문에 상처받거나 함께 일하기 힘들었던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내 질문은 사실 ‘보수적이고 우회적인 의사소통을 선호하는 이 조직에서 어떻게 오랜 시간 그런 태도와 성향을 유지할 수 있으셨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었다. 그건, 인터뷰 전에도 도중에도 나와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던 차장님에 관한 질문이자, 나라는 사람과 조직이 바라는 인재상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느낀 시점에 내가 가졌던 의문이기도 했다.


“나는 우리 조직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들어왔잖아.”


롱런은 비결이랄 게 없었다. 눈만 뜨면 성장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기에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아이디어가 필요했고, 치열한 논쟁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고 차장님은 덧붙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본인이 이바지할 수 있는 역할이 계속해서 있었고, 그렇게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고 더 잘할 수 있는 업무를 선택하다 보니 지금 여기까지 왔다는 설명이었다. 겸손의 말씀이었겠지만 ‘이 성격 가지고 버티는 건 시대를 잘 타고나서 가능했던 거고 지금은 나 같은 사람 있을 자리 없다’로 자체 통역이 되어 귀에 박혔다. 조금 더 부연하자면, 성장이 멈추고 비대해진 조직을 경영해야 하는 지금 우리 조직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보다는 순응하고 화합하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우리 조직에 잘 맞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비슷한 사람들을 채용하고 있지 않냐며 오프더레코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몇 분간 이어가셨다. 그리고 다음 말이 차장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틀린 걸 틀렸다고 얘기 못 하고 다르다고 하고 넘어가잖아.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까.”


그건 대리였던 시절 내가 부서장님께 당돌하게 던졌던 말과 거의 똑같은 발언이었다. ‘다른 건 저도 다르다고 하는데 이건 틀린 겁니다’라는. 그리고 그 순간, 이 조직에서 근속 10년, 20년을 맞이하고 차장님과 비슷한 나이가 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여기서 오래 버텼다면 나도 이 모습에 가깝지 않았을까. 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에게 불편 혹은 미움을 사더라도 자기가 주장하는 바를 꺾지 않고, 지위나 안락함보다는 일의 본질에, 그리고 내가 재미있어할 일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결코 차장님처럼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고속 성장하는 조직에서 내 연차쯤에 이미 많은 것을 이루고 경험했던 차장님과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상황 속에 있으니까. 새로운 기술과 기후변화가 바꾸어놓을 세상 속에서 기관은 지금과 또 다른 상황 속에 놓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나에게는 갈수록 이질감만 느껴지고 더 이상의 기회도, 환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차장님처럼 뒤늦은 파견이라는 용기를 내기에도 나는 자격이 모자라니까, 그런 점을 모두 고려하면 조직 내에서 계속해서 기여할 곳이 있고 본인도 성장하면서 장기 근속하는 게 얼마나 많은 상황을 극복해야만 하는 건지 조금이나마 실감이 났다.


더욱이 존경받는 장기 근속자란 더더욱 희귀한 것,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대선배 몇 명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입사 때부터 이 퇴사 결정을 하기까지 중요한 기로마다 찾아가 알리고 의견을 구했던 분, 너무 좋아하는 선배이자 ‘착한 전문가’의 모델로 삼은 분이었지만 그를 완성하는 덕스러움은 내 기질에 도무지 없는 것이었다. 또 다른 선배는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일도 해결해 내고야 마는 유능함과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겸비했지만, 그만큼 업무에 몰입하고 일 자체를 즐길 자신이 없었다. 분명히 한편이라도 닮고 싶은 선배들을 마음속에 두고, ‘여기서 저만큼 일했을 때 내 모습이 저기에 가깝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일했지만 기질, 성향, 상황 모든 면에서 나와는 너무 큰 간극이 있었다. 열심히 따라간다 해도 결코 그들과 같이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퇴사를 앞둔 상황이라 아무 상관은 없지만 결국 나는 저 선배들처럼 조직 내에서 인정받을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애초에 이 조직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정년까지 맞이하는 게 내 목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내 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몇 선배들을 롤모델 삼은 이유 또한 그들이 이 조직 내에서 오래 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이 일터를 내 생각보다 더 사랑했나 보다. 어느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이유로 떠날 때라고 판단하긴 했지만, 수년간 마음 다해 일했는데도 이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못내 서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원하지도 않는 롱런의 비결을 물으며 내게는 없는 그 조직적합성이 어떤 것인지 대답을 듣고 싶었나 보다.


달라진 환경의 조직에서 롱런하기 위해서는 아마 선배들 때와는 전혀 다른 역량과 조건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순종적인 사람, 어쩌면 기회를 잘 잡는 사람, 내 드센 기질은 튀지 않을 정도로 깎아야 하고, 워커홀릭처럼 몰두하면서도 죽는소리하지 않아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 뭐라 분명히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롱런의 롤모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선배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든 그대로 따라 하는 게 현재의 조직에 적합성이 높은 방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좋아하는 선배들이 어떤 분들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그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을 찾기란 어렵지만 자기 기준의 성취와 올바름을 위해 항상 열심을 내고 또 경계하며 돌아보는 모습을 나는 좋아했던 것 같다. 그분들처럼 롱런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지만, 내가 닮고 싶었던 모습이 그 비결은 아니었기에, 이 조직을 떠난 뒤에도 그 가치는 유효할 것이고, 이후에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한다 해도 여전히 나는 그들을 닮고 싶어 할 것이다. 내 안의 가장 좋은 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과정에서 한 조직에 오래 머물 수도 있겠지만, 짤막한 직장생활을 이어 나간다 해도 괜찮다. 롱런의 롤모델은 필요 없다. 하지만 특정 조직에 필요한 사람을 넘어 언제 어디에서도 정말 괜찮은 사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기까지 수많은 롤모델이 필요할 것이다. 그때그때 속한 곳에서 배울 점이 있는 멋진 선배와 동료들을 찾아내면 된다.


인터뷰했던 차장님의 기사가 실린 두 번째 레터를 전사 발송한 뒤 얼마 후 퇴사했다. 영원할 것만 같은 나의 컴포트 존Comfort zone이었던 이 조직에 대한 애정과, 닮고 싶었던 선배에 대한 존경, 남아있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행간에 가득 숨겨놓았다. 누군가는 꼭 읽어내 주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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