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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Jul 18. 2020

남편은 공군 병장, 아내는 공군 대위

군대에서 남편 찾은 사연


남편은 공군 병장 출신이다.

나는 공군 대위 출신이다.

우리는 둘 다 전역한 퇴역 군인들이다.



24살이 되던 해, 나는 비행 훈련을 그만두고 지상 근무를 시작했다. 처음 맡은 보직은 수송대대 행정계장. 부대에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관리하는 것부터 시작해 예산이나 병력들을 관리하는 살림꾼 역할이었다.


당시 20살 앳된 청년이던 남편은 내가 근무하던 수송 대대로 배치된 신병이었다.

 

"피!!! 씅!!!!!"


진주에서 실시하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직후라 잔뜩 군기가 들어 있었다.

가뜩이나 마른 체형에 군복은 또 왜 이렇게 큰 걸 입었는지, 마치 전투복을 입은 힙합 전사 같았고, 머리둘레는 또 너무 작아서 군모는 삐뚤어져 있었다. 변성기가 아직 안 왔는지 목소리는 3옥타브 저리 가라, 엄청난 하이톤이었다.


'하이톤을 자랑하는 마른 힙합 보이'


이것이 내가 느낀 남편의 첫인상이었다.


나는 남편을 비롯해 네 다섯 명 정도 되는 신병들과 면담을 하고 총기를 지급했다.


"자, 이게 너희들이 앞으로 사용하게 될 총기야. 관건 철저히 하는 거 다들 배웠지?"

"네 그렇습니다!!!!"


신병들은 참 대답을 잘하지만, 그 대답은 항상 "네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정도로 요약된다는 단점이 있다.


여하튼 우리는 그렇게 군 생활의 일부를 공유했다. 내가 두 달 뒤 다른 부대로 전속을 가게 되면서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은 두 달 남짓이었지만, 우리 둘 다 기억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하루는 내가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보통 당직 사관들은 자차나 관차를 이용해 순찰을 돈다. 새벽 2시 정도에 지정된 장소들을 돌아보고 서명을 해야 하는데 당시 나는 장롱 면허를 갖고 있었기에 운전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나는 당직 근무를 하게 되면 '산책이나 하자'라는 마음으로 걸어 다니며 순찰을 도는 편이었다.


부대 안의 새벽은 정말 칠흑같이 어둡고 고요하다. 특정 순찰 구역은 이상한 철탑 위로 올라가기까지 해야 하지만 그 당시 나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걸어서 순찰을 돌고 있는데 저 멀리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은 병사들이 과자나 음료수 등을 사 먹는 PX 옆 공중전화였다. 순찰용 플래시를 비춰보니 '하이톤을 자랑하는 마른 힙합 보이'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불빛에 놀란 힙합 보이는 전화 수화기를 얼른 내려놓고 '얼음 땡' 놀이를 할 때의 '얼음' 자세가 돼 있었다.


"거기 누구야"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여자 친구랑 통화했어?"

"아닙니다!!!"

"(웃음) 짜식이 시간이 몇 신데. 얼른 들어가!"

"(후다 다다다 다닥)"


힙합 보이는 빛의 속도로  눈 앞에서 사라졌다. 사실 새벽에 몰래 나와 공중전화를 쓴 건, 그것도 신병이 그런 행동을 한 건 군장 매고 기합 받을 사건이었지만, 나는 '얼마나 목소리가 듣고 싶고 그리웠으면 이 밤 중에 몰래 나와 전화를 했을까'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군대도 사람 사는 곳인데, 괜히 일을 크게 만들어서 힙합 보이를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아마도 남편 입장에선 내가 별소리 안 하고 넘어가서 십 년 감수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소소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여하튼 나는 두 달 뒤에 국방부로 전속을 가게 됐고 부대 병사들과는 이별을 했다. 당시 가장 유행하는 SNS는 페이스북이었는데 핸드폰을 이용할 수 없는 병사들은 부대 안에 마련된 사이버 지식정보방(일명 싸지방)이라 불리는 인터넷 사용 공간을 이용해 내게 페이스북 친구 요청을 해왔다. 친구에 친구를 타고 부대 수많은 병사들이 친구 요청을 했고, 페이스북 친구에 큰 의미를 두지 않던 터라 웬만하면 다 요청을 수락해줬다. 여기엔 힙합 보이도 있었다.


내가 부대를 떠날 때 병사들이 내게 한 마디씩 쓴 롤링 페이퍼를 선물했는데, 당시 남편은 이런 말을 남겼더라.

계장님. 안녕히-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5년의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고 전역해 자유의 몸이 됐고 한 NGO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페이스북 친구로 연결돼 있던 힙합보이, 지금의 남편으로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게 됐다.


"누나, 안녕하세요!"

"어머! 성열아 반가워!^^"
"누나, 저 성열이가 아니고 승열인데요.."


알고 보니, 미술을 전공하는 남편이 캘리그래피 전시를 돕고 있는데 내가 페이스북을 통해 올려왔던 캘리그래피 사진들을 보고 연락해 왔던 것.


"누나, 이게 일반인 작가들을 섭외해서 전시를 하는 거라, 한 번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머 진짜? 재밌겠다. 어떻게 하는 건데? "

"시간 되시면 제가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언제가 편하세요?"

"내가 평일에는 일 마치면 8시는 돼야 하는데.. 아니면 주말에?"
"제가 내일 누나 있는 쪽으로 8시까지 갈게요."


전시가 급했나 보다. 남편은 메시지를 보내온 다음날 만나자고 제안했다. 나도 딱히 퇴근 후 하는 일이 있던 건 아니었으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 살고 있던 이태원 근처의 한 카페에서 남편과 만나게 됐다.



남편과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퇴근 후 지하철에 올랐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남편에 대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워낙 짧은 기간만 같은 부대에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도 신기한 건, 내가 5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병사들을 만나왔는데 두 달가량 알고 지낸 남편에 대해 기억을 한다는 점이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아무튼 '신기한 인연이야~'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약속 장소에 나갔다.


때는 바야흐로 2015년 3월 5일. 아직은 꽤 쌀쌀한 겨울 날씨에 한 찻집에서 남편을 다시 만났다. 카페 안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는데 뒤에서 "누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씩 웃으며 나타난 남편은 내가 기억하던 '하이톤을 자랑하는 마른 힙합보이'와는 조금은, 아니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의 늠름한 청년이 돼 있었다.

우선 "누나"라고 부르는 그의 음성에는 하이톤이 아닌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6년 전 오지 않았던 변성기가 이제는 지나간 모양이었다. 전투복을 힙합 스타일로 입고 있던 그의 옷차림 역시 말끔한 재킷과 핏이 살아있는 청바지로 탈바꿈 해 있었다. 사이즈 맞지 않는 삐뚤어진 모자를 쓰고 있던 머리는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돈돼 있었다.


"어머! 야! 너 너무 멋있어졌다!"


이것이 내가 꺼낸 첫 멘트였다. 나와 남편은 동네 누나 동생처럼 쉬지 않고 수다를 떨며 그간의 이야기를 나눴다. 6년이란 시간 동안 서로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이야기하기 바빴다.

사실 캘리그래피 전시에 대한 이야기는 10분 정도 했던 것 같다. 그 후로 남편은 내게 '전시 카탈로그도 있는데 그것을 주지 못했다 언제 시간이 되냐'며 다시 연락해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이지만, 남편은 나와 찻집에서 처음 만난 이날, '이 누나랑 결혼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평소 남편은 비혼 주의를 외치고 다녔다고 하는데, 왜 그가 나를 단 하루 만나고 결혼을 결심하게 됐을까?


우리는 3월 5일 찻집에서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같은 해 6월 27일에 결혼을 했다.

사귀기로 시작한 3월 20일을 기준으로 3개월 7일 만이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결혼 6년 차에 접어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강한 이끌림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국수를 호로록 말아먹듯 결혼했고 병장과 대위라는 계급장을 때고 남편과 아내로 사랑하기로 약속했다.


그래도 웨딩사진은 계급 달고 찍었다. 이것도 기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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