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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Oct 10. 2020

10년 치 일기장을 몽땅 태우던 날

내 삶의 무게를 덜 수 있게 도와준 남편

나는 중학교 때부터 매일 일기를 써왔다. 뭐 하나 시작하면 작심삼일로 끝내기 대장이었지만 일기 쓰기만큼은 성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이어지는 나의 유일한 습관이었다.  


일기 쓰기를 좋아했던 건, 일기가 내 사소한 감정 하나하나를 다 쏟아 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자 친구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때 일기를 보면 실제로 “일기장아. 넌 그렇게 생각 안 하니?” “ 일기장아. 넌 내 베스트 프렌드잖아. 넌 날 이해하지?” 같은 문장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노트가 어떻게 대답을 하겠냐만은, 나에게 일기장은 살아 숨 쉬는 존재 같은 거였다. 내 모든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친구. 때로는 내 눈물도 종이에 적셔주고, 내 고민도 들어주고, 나와 함께 희망을 찾아주는, 그런 소중한 친구 말이다.


여군으로 오랜 생활을 하면서도 단연 내 단짝은 일기장이었다. 그곳에서 느꼈던 부조리와 답답함, 흔들리는 방황의 시간들까지. 가까운 친구에게조차 터놓지 못할 내 가슴 깊은 곳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은 그 누구도 아닌, 내 일기장에게 있었다.


성인이 되고나서부터 결혼 전까지 10년 넘게 써 온 일기장만 해도 두 박스 정도였다. 군인일 때부터 여기저기 이사를 많이 다녀야 했는데 다른 건 다 버려도 일기장만큼은 반드시 짊어지고 다녔다. 어떻게 11년의 숭고한 역사를 함께 한 내 베프를 쓰레기통에 버린단 말인가!



하지만 내게도 일기장을 처분하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남편을 만나고 나서다. 이야기하자면 복잡하지만 20살부터 시작해 10년 넘도록 쌓아온 내 일기장 속에는 갖가지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다. 군대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또 개인적으로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를 아는 남편이 계속 이렇게 일기장 박스를 가지고 다니지 말고 이번 기회에 정리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제안했다. 섣불리 결정하기 힘든 문제였다. 내 소중한 일기들과 이별을 한다고? 안돼. 안돼.


근데 또다시 생각해보니, 사실 지난 10여 년 간의 일기장 속에는 참 아픈 일들이 너무 많았다. 군대라는 곳에서 여군으로 지내며 견뎌야 했던 내 정신적 고통들을 비롯해 나쁘게 끝맺은 연애 등 내 삶에 대한 괴로움이 너무 많이 적혀 있었다. 물론 내 일기장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지만, 혼자서 계속 그 어두운 과거를 들춰보기보다는 남편과 함께 하는 새로운 미래를 다시 써내려 가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인생의 챕터 2가 시작됐다고나 할까. 하지만 늘 일기장에 의지했던 내겐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며칠의 고민 끝에 나는 남편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당시 우리는 결혼식을 2주 정도 앞두고 있었다. 남편은 차 트렁크에 낡은 일기장들이 가득 든 라면 박스 두 개를 싣고 나를 태운 채 어딘가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가보면 알아.”


남편은 계속 북쪽을 향해 운전했다. 시야에서 점점 높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눈 앞엔 넓은 벌판들이 펼쳐졌다. 때는 오후 6시가 넘었고, 저 멀리 붉은 태양은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했다.



남편은 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차를 세웠다. 굴다리 밑에서 동네 사람들이 뭔가를 태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여기다.”


남편은 일기장 박스를 꺼냈고, 라이터를 사용해 불을 붙였다. 나는 손으로 일기장을 찢어 불 더미에 던졌다.


“촥-촥-“


묵직한 일기장들이 내 손에서 찢겨 나갔다. 불 구덩이에 들어가 빨갛게 타오르더니 이내 하늘하늘한 깃털처럼 가벼운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그간 켜켜이 쌓여있던 내 모든 상처들도 한 줌의 재와 함께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후련하다.”

“그래?”

“응. 난 왜 이 무거운 걸 10년이 넘도록 어깨에 메고 다녔을까?”


그렇게 우리는 붉은 노을이 드리워진 파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타오르는 일기장의 불꽃을 조용히 바라봤다. 두 박스의 일기장이 모두 타고난 뒤 그 위로 물을 부었다. 이미 사방에 짙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그렇게 나는 애지중지 모시고 다니던 지난날의 일기장들과 이별했다. 후회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기 쓰기가 멈춘 건 아니다.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일기를 쓰지만 예전에 비해서 확실히 노트에 글을 쓰는 일은 많이 줄었다. 노트 대신 블로그에 비공개로 혼자만의 일기를 자주 쓰곤 한다.


남편을 만나, 더하는 법이 아닌 빼는 법을 배운다. 좀 더 가볍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남편이 제시해준다. 나는 한 번도 하지 못한 생각들,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남편 덕분에 해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물리적인 일기장 박스가 사라지고 나서 내 삶은 한결 가벼워졌다. 내 실제 짐이 가벼워지기도 했지만, 내 마음도 훨씬 많이 홀가분해졌다. 지나간 과거보다는 지금을, 그리고 앞으로 남편과 새로 만들어가는 미래를 더욱 꿈꾸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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