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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Oct 25. 2020

우리를 향한 운명의 갈림길 앞에서

군대 이후 6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남편은 내게 유학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미술 중에서도 설치미술을 전공한 남편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지만 영국 런던에서 건축을 더 배우고 싶어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당시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나는 “넌 너무 웃기니 개그맨 시험 꼭 봐라”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진짜 개그우먼이 될 수 있는 사람일까가 궁금했다. 궁금한 건 못 참고 꼭 실행에 옮겨봐야 직성이 풀리는지라 회사를 다니면서 조심스레 KBS 개그맨 공채에 지원했다.


1차는 서류 전형으로, 지원자가 작성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합격자를 가린다. 수천 명이 지원한 KBS 공채 1차에 합격한 건 대략 1천5백 명 가량이었다. 운 좋게 이 1500명 안에 든 나는 2차 실기 시험을 보게 됐는데, 2차는 지원자가 준비한 개그를 현장에서 선보이는 것과 즉흥 시험으로 치러진다.


이제 내 무대가 ‘내 지인’에서 ‘전 국민’이 될 수 있을지를 평가하는 시간. 시험이 치러지는 건물로 걸어가는데 전라도와 경상도를 비롯해 여기저기 지방에서 단체로 올라온 봉고차들이 보였다.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자, 그야말로 딴 세상이 펼쳐졌다. 뽀글뽀글 머리를 뽐내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청년부터 시작해 반짝이 무대의상을 입고 춤 연습을 하는 분까지, 그야말로 전국에 개성 넘친다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압도적인 비주얼에 비하면 나는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꿀리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애당초 ‘꼭 붙어야만 해’하는 절박함이 아닌, 내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함이었으니 오히려 이 시험을 즐기는 입장은 내 쪽이었다.


드디어 차례가 다가왔다. 준비한 개인기를 하고 현장에서 주어지는 즉흥 연기를 했다. 생각보다 현장 분위기는 살벌했다. 7-8명 정도 되는 심사위원들이 하나같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주눅 들진 않았다. 내가 어떤 시나리오를 준비해 개그를 했는지 정확히 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내 할머니 개그에 심사위원 한 분이 빵 터지셔서 엄청 웃으셨던 건 분명히 기억이 난다. 시험을 끝내고 방을 나가려는데 나를 노려보던 심사위원 한분이 질문했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엄청난 하이톤으로) 네에~ 서른 하나 입니다~”


그렇게 나의 2차 시험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났을까, 나는 2차 시험에 합격했으니 공채 최종 시험을 보러 오라는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이때부터 심경이 조금 복잡해졌다. 천 명이 넘는 2차 지원자 가운데 약 100명을 추려 최종 시험을 보게 했는데, 그 100명에 내가 또 뽑힌 것이다. 시험을 보러 가긴 해야 할 것 같은데, 팀장님껜 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됐다. 하지만 확실히 붙은 것도 아닌데 괜히 이야기했다가 일이 커질까 봐, 이번에도 그냥 반차를 신청했다.


그날 오후, 팀장님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백 간사, 우리 차 한잔 할까?"


조그마한 회의실에서 팀장님과 나는 대화를 나눴다. 개그맨 시험에서 최종단계까지 오게 됐다고 말씀드렸다. 안 그래도 큰 팀장님의 눈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합격하면 진짜 할 거야?”


평소 나의 개그감각을 알고 있던 팀장님의 눈빛은 4명밖에 없는 팀원 중 한 명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진짜 되면 해보려고 생각은 하는데. 안될 거 같기도 해요 팀장님.”


팀장님의 얼굴은 울그락 불그락 복잡해졌지만, 그래도 끝내 내 반차를 승인해주셨다.



남편과 연애를 시작한 지 2주 차가 되던 날, 남편은 영국의 한 학교에 최종 인터뷰를 보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이틀 뒤, 나는 개그맨 공채 최종 시험을 보기 위해 다시 KBS 본사를 찾았다.


당시 남편은 내 개그맨 시험을 위해 영국에서 음악도 편집해주고 시나리오를 같이 검토해주기도 했다.


내가 만약 이 최종 시험까지 합격한다면 2년 계약의 KBS 신입 개그우먼이 될 예정이었고 남편이 유학 면접에 합격한다면 남편은 유학을 위한 어학연수를 해외에서 1년 하고 이어서 학업을 계속해나갈 예정이었다.


'우리를 향한 운명은 무엇일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꿈을 응원했다. 진짜 개그맨 공채에 합격하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란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남편은 그런 나에게, “누군가는 나로 인해 합격하지 못한 것이니 그 사람에게 미안하지 않게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시험을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대충대충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전국 팔도 할머니 성대모사를 하려던 내 시나리오를 전면 수정했다. 뭔가 시나리오에 내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드디어 최종 시험일. 준비한 대로 다 하고 나오긴 했지만 너무 진지했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홀가분했다. 최선을 다했고, 후회는 없었다.

최종 시험을 보던 날, KBS 모퉁이 어디에선가 찍었던 사진




그렇게 일주일 넘게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다. 나는 그 해 KBS 개그맨 공채 최종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고, 남편은 당당히 지원한 학교의 합격장을 받아왔다.



남편은 한국을 떠나야 했고 나는 회사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한국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의무는 없었다. 우리는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외국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결혼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추진됐고, 결혼식을 올린 후, 곧장 아일랜드 더블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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