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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Jul 23. 2020

커터 칼로 고백받았습니다

이천 원으로 사랑을 전하는 법

캘리그래피 전시를 이야기 하기 위한 첫 만남 이후 그는 다시 연락해 왔다.


"누나, 깜빡하고 전시 카탈로그를 안 줬네요... 이걸 보면 이번 전시가 더 이해가 잘 되실 거예요. 제가 한 번 들러서 전해 드릴게요."

"아 그래? 그러면 주말에 볼래? 이번 주 평일엔 계속 바쁠 것 같아."


이렇게 해서 우리는 2015년 3월 14일 토요일, 이태원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카탈로그를 주면서 전시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해줬다. 그러더니 대뜸 질문을 던진다.


"누나,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어머, 야. 나 4년 동안 연애 못했잖아."

"(피식)"


그의 얼굴에서 실 웃음이 세어 나왔다. 갑자기 가방에서 주섬주섬 뭘 꺼내 드는데, 조그만 케이스에 든 알록달록한 사탕이다. 그날이 화이트데이 인지도 몰랐던 나는 웬 사탕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엄마 거 사다가 하나 더 샀어요."


물론 위 진술은 100% 허위였음이 뒤늦게 밝혀졌지만 (나 줄려고 사면서 엄마 것을 하나 더 산 것)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사탕을 받아 들었다.


"야. 너 센스 있다. 오늘이 화이트데이구나. 고마워 잘 먹을게!"


나는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어 사탕을 하나 집어 물었다. 콩알만큼 작고 동글동글한 사탕은 맛도 좋았다. 오물오물 사탕을 녹여 먹으며 대화를 하는데 어찌나 재미있는지, 둘이서 몇 시간씩 떠들어 댔다. 그는 나의 유머 코드를 재빨리 간파했고 쉴 새 없는 유머 폭탄을 날려왔다.


이후 그는 자신이 같이 일했던 작가가 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다음 주 토요일에 같이 가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미술이나 전시에 아는 바가 거의 없던 나는 생소하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이를 수락했다.

 


하지만 일은 이보다 하루 앞날 벌어졌다.

3월 20일 금요일 오후, 나는 많은 업무량에 치인 채 일을 하고 있었다. 이번 주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기획이 있어 바빴다. 그래도 금요일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빨리 일 끝내고 집에 가서 쉬어야지! 오늘 같은 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타탁 타탁 키보드를 두드리며 일을 계속해 나가는 와중에 카톡 메시지가 떴다.

[누나, 혹시 오늘 저녁에 잠깐 시간 되세요?]


토요일에 만나기로 한 승열이가 내게 오늘 보자고 연락을 해왔다. 내일 보기로 했는데, 오늘 왜 또 보자고 하지? 몸은 피곤했지만 평택에 사는 그가 이미 서울에 와있다는 말에 그러자고 했다. 강남역 교보문고 근처에서 보기로 하고 빨리 일을 마무리 한 뒤 약속 장소로 나갔다.


교보문고 앞에서 만난 우리는 여기서 한강이 가까우니 한 번 걸어가 보자고 했다. 추운 날씨였지만 그래도 계속 걸으면서 떠드니 추운지 몰랐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미각을 잃었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어쩌다 감기에 걸렸는데, 이후에 미각을 잃어버려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고통스러웠다 등 그때의 상황을 계속 이야기했다.

뭔가 횡설수설하는 느낌이랄까? 그의 이야기는 주절주절 두서없었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한강에 너무 오래 있으니 점점 손이 차가워졌다. 바람도 꽤 불었다.


"아우 추워. 우리 어디 들어가서 따뜻한 거 한잔 마시자."


주변을 둘러 보니 아파트 상가 쪽에 위치한 빵집 하나가 보인다. 그는 커피를, 나는 유자차를 주문했다. 늦은 저녁, 조그만 빵집엔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다. 실내로 들어와 따뜻한 차를 마시니 몸이 녹는 듯했다.


그때였다.

그는 가방 지퍼를 열고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이번에 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커터 칼이었다. 이 남자가 여기서 갑자기 왜 커터 칼을 꺼낼까.


"찌이익"


심지어 그는 커터 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쭉 뽑아 들었다. 내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는데, 그는 갑자기 그 칼로 입고 있던 흰 셔츠의 밑 단을 찢었다.


"이게.. 잘 안되네..."


셔츠 단을 커터 칼로 잘라내고 싶은 모양이다. 난 도대체 이 남자가 뭘 하려는 걸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계속 그를 바라봤다. 결국 10센티미터가량 흰 천을 길게 잘라낸 그는 그 천으로 내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처럼 묶어 주었다.


"누나, 제가 사실 지금 일을 그만두고 유학을 준비하고 있어서 돈이 없어요. 누나한테 예쁜 반지를 사주고 싶은데 돈이 오천 원밖에 없어서 커터 칼을 샀어요. 지금은 비록 이 반지지만, 제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진짜 예쁜 반지 누나 손에 끼워 줄게요."


"... 그리고 제가 담배를 피우는데, 그것도 끊을게요."


뜬금없는 그의 고백에 당황했지만, 솔직하고 순수한 그의 고백이 내 마음을 울렸다.

당시 나는 그가 흡연자인 것도 몰랐는데, 먼저 솔직하게 말해주고 또 끊겠다고 말해 준 것에도 감동했다.


비싼 반지를 받은 고백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셔츠 천 반지를 받은 내가 더 특별하게 여겨졌다.


'이런 사람이라면, 한 번 만나봐도 좋을 것 같아.'


2015년 3월 20일,

우리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천 반지를 지갑에 넣고 다녔는데 소매치기당해서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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