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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Oct 15. 2020

웨딩촬영이 물감을 만났을 때

해보고 싶은대로 해보는거지 뭐

때는 2015년 5월, 결혼식을 한 달가량 앞둔 우리는 웨딩촬영을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아이디어 뱅크인 남편이 먼저 운을 떼었다.


"내가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 번 해볼래?"

"뭔데?"
"물감을 사서 야외에서 촬영을 하는 거야. 진짜 근사할 거야. 나만 믿어."

"나는 항상 믿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보자!"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웨딩촬영이나 결혼에 대한 의사결정은 보통 '신랑'보다는 '신부'의 주도 하에 이뤄지는 듯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정 반대였다.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남편이 대부분의 것들을 결정했다. 심지어 남편은 내 고향인 부산까지 혼자 내려가 우리 엄마 아빠, 그러니까 남편의 입장에서는 장모님, 장인어른과 셋이서 결혼식장을 보고 다녔다.


아무튼, 우리의 사진을 찍어줄 사진작가 역시 남편이 여러 작가들의 사진들을 본 뒤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 한 분을 선정했고, 넓은 들판이 펼쳐진 야외에서 우리의 웨딩 촬영이 시작됐다.


사진작가님과 연계된 한 미용실에서 머리와 메이크업을 마친 우리는 작가님이 보유한 몇 가지 의상을 골라 입고 촬영에 임했다. 콘셉트는 총 4가지. 남들이 다 하는 웨딩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진 하나. 한복 사진 하나. 우리 부부의 특색을 살려 군복 사진 하나. 그리고 마지막은 물감을 이용한 자유 촬영이었다.




나는 공군 대위 계급장이 달린 정복을, 남편은 공군 병장 계급장이 달린 약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군복 콘셉트도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우리 웨딩 촬영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물감을 이용한 자유 촬영이었다.


남편은 촬영장으로 이동하기 전 문구점에 들러 몇 가지 색들의 물감을 사 왔다. 물감을 뿌리면서 찍는다는 것이 주요 콘셉트이었기 때문에 나와 남편은 인터넷에서 저렴한 흰색 옷을 구입해온 상태였다. 나는 2만 원 대의 화이트 드레스를, 남편은 1만 원 대의 흰 셔츠를 갈아입었다. 마시고 있던 트레비 생수 병의 물을 이용해 물감을 희석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신나는 놀이가 시작됐다.


남편과 나는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물감을 서로에게 뿌려댔다. 우리가 물감으로 장난치는 장면을 작가님이 정신없이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얼굴에, 머리에, 팔에, 옷에, 사방에 물감이 튀었다.


약간은 경직된 표정으로 촬영에 임했던 남편은 머리에 물을 붓더니 본격적으로 내게 물감을 뿌려댔다. 어색한 표정은 완전히 사라지고 짓궂은 27살의 어린이로 바뀌어 있었다.


"악~~!!"

"크크크크크크"

"얍~~~ 보라색이닷~~"


상대방이 뿌리는 갖가지 색깔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우리는 물감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 점프샷도 해보고 빙글빙글 돌아도 보면서 촬영을 했다. 아니, 사실 촬영은 작가님이 한 거고 우리는 진짜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한 바탕 신나게 놀고 나니 촬영이 끝났다.


사진작가와 헤어진 뒤 우리는 그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목욕탕을 검색한 뒤 그리로 향했다. 머리부터 시작해 온 몸이 물감 투성이었다.


"1시간 있다가 만나자."

"응"


남탕과 여탕으로 각각 헤어진 우리는 열심히 물감을 씻어냈다. 남편은 머리가 짧아서 아마 나보다 훨씬 빨리 씻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당시 긴 머리에 온갖 물감 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어 머리를 10번도 넘게 감아야 했다.

한 번 감으면 보라색 물이 나오고, 또 한 번 감으면 초록색 물이 나왔다. 아무 색도 안 나올 때까지 감고 또 감아야 했다.


우리가 입었던 물감 가득한 흰 드레스와 셔츠는 예쁘게 접어 그대로 보관하기로 했다. 옷에 묻은 물감을 빨고 싶지 않았다. 이 옷들은 아직도 한국의 시댁 다락방에 고이 모셔놨다. 언젠간 다시 이 옷을 입고 물감 놀이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남편의 아이디어가 좋다. 평생 범생이처럼 살아온 나는 창의적인 생각을 하는 게 제일 어렵다. 남편은 나와 완전 달라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불쑥불쑥 잘도 튀어 나온다.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남편이 해보자고 하는 건 다 하는 편이다.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하고 나면 늘 재미있기 때문이다.


입술에 경련 일어나며 끝날 뻔 한 웨딩 촬영은 그렇게 우리답게, 짓궂게 끝이 났다.


남들이 가는 방식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만의, 나만의 색깔을 담아낼 수 있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든, 얼마나 이상하든 관계없이 꼭 시도해보자.

그래야 남은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만의 색깔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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