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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소나기에 젖어버린 날엔 그저 웅크리자

밥과 시를 마시는 도서관의 발 없는 새 3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오늘은 공자님 말씀처럼 기쁜 우리 젊은 날



그치만 공자님 말씀처럼 예를 다하기란 어렵다


오늘은 서로 말을 흐리다가 소나기에 젖은 날


그냥 피곤해서였을까 사소한 반찬투정일까


어쩌면 나만 소나기를 맞은 걸지도



또 소심해지고 의기소침해지는 마흔의 꼬맹이 나.


실망하고 싶지 않고 파멸하고 싶지 않은 나


그치만 박찬일 시인이 날 조용히 타이르지


햇볕이 쬐지 않는 곳은 파멸하지 않는 곳


파멸하고 몰락하러 나간다면


어쩌면 그야말로 살아있는 자의 의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동굴을 나가자 고고하던 그의 몰락이 시작되었듯이


살아가려면 몰락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나 못난 나도 나라는 작은 체념 혹은 수용


그리고 스스로를 위한 작은 선물을 줘야지




물론 때로는 나에게 선물주기마저 빗나가기도 한다


만화방 고양이마저도 외면당하는 하루


바닥 밑에는 더 깊은 바닥이 있다더니


이런 날엔 어찌해야 하나


그저 주저앉아 애처럼 울어볼까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하죠 물어볼까나




물론 특별한 비법이나 묘책까지 필요없다


그저 조용히 기다리면 고양이가 또 옆에 오듯이


인생은 종종 가만히 숨죽이는 날도 필요하더라


또 파도가 칠 거고 강도 바다도 흐를 테니까


그저 오늘도 돛을 펴고 노를 젓는 연습을 해두자


언젠가는 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내일은 천천히 출발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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