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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Feb 16. 2024

첫 라면을 기억하세요?

1992년 그해 여름.

달고나 사건이 있었던 그 집은 사실 나의 기분 좋은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집이다.


사이좋게 자리를 잡고 있는 두꺼운 나무판자들 사이로 내 몸이 그대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구멍. 깊이 파여 있는 그 아래를 차마 볼 수도 없지만 볼 일을 안 볼 수도 없는 재래식 화장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용해 보았던 집이라 지내는 동안 무척이나 힘들었다. 매번 화장실을 다녀오는 게 일이었고 그만큼 시간도 오래 걸렸다. 해가 지고 난 이후로는 정말 급할 때만 할아버지와 동행해서 볼일을 보러 갔다. 나의 어린 시절을 그렇게 힘들게 만든 집인데도 ‘기분 좋은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집’이라고 말함에 대해 누군가 왜냐고 물으실 생각이라면 “라면”이라고 대답할 생각이다.


내가 처음 라면을 먹은 날은 지금도 생생하다. 일곱 살 여름이었다.


에어컨도 없었고 그나마 안방에 있는 선풍기 하나로 버티던 시절, 나는 한창 더울 시간에 한참 놀다가 땀을 뻘뻘 흘리고 빨빨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할아버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땀을 흘리는 나를 보시고는 우리 집 마루 앞의 수돗가에서 미지근한 온도로 큰 고무 대야 가득 물을 채워주셨다. 그럼 나는 팬티 한 장만 걸친 채로 그 속에 풍덩 들어가서 씻는 기분으로 놀았다.


내가 그렇게 물속에서 놀고 있는데 어디선가 처음 맡아보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따라 시선이 향한 곳은 옆집의 마루였다. 달랑 냄비 하나를 둔 작은 상 앞에 앉은 옆집 언니가 한쪽 손에 냄비 뚜껑과 한쪽 손에는 젓가락을 들고서 뭔가를 후루룩대고 있었다. 냄비 뚜껑이 그릇인 것 같았는데, 냄비 뚜껑이 그릇 역할을 해주는 그게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어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일단 나를 씻겨 주시고 정성껏 닦아 주시고 로션까지 발라주신 후 옷을 입혀 주셨다. 그리고 말없이 부엌으로 가셨는데 짧은 시간에 뚝딱! 옆집 언니 앞에 있었던 것처럼 냄비 하나를 둔 상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가까이서 맡아보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 냄새가 났다. 뜨거워 보이는 냄비의 뚜껑을 열어 든 채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이기 뭐냐면은 라면이다 라면!”


눈과 입이 동시에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던 나도 말했다.


“할아부지. 내 마루에 가서 먹을래요.”



그렇게 옆집 언니를 따라 (혹은 옆집 언니 덕분에) 나의 첫 라면 경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꼬불거리는 면이 입으로 들어올 때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는데도 후루룩 소리가 나는 게 신기했고, 국물을 마실 때는 빨간색이지만 빨간 맛은 아님을 느꼈다. 생애 첫 라면을 먹은 나는 거의 황홀한 지경이었다.



세월은 양은 냄비 속의 면발처럼 흐르고 흘러 지금은 라면보다 푸짐하고 맛있는 것들이 많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라면을 좋아한다.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나. 라면은 완전식품이라고.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그 말을 지지한다.


쓰다 보니 글에서 라면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아... 집에 가서 라면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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