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도 안 하고 살다가 불현듯 뇌리를 스치면 그때부터 갑자기 갈구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게 전 남자 친구처럼 사람과 기억일 수도 있으나 한 번씩 찾는 먹을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부쉬맨 브레드라던가.. 양송이 수프라던가.. 투움바 파스타라던가...
매일 생각하는 메뉴가 아닌데도 한번 떠오르면 걷잡을 수 없이 먹고 싶어 지는 것. 내게는 그것이 투움바 파스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가 하필 평일이었고 당시 오후 출근을 하던 나는 평일 낮 시간에 점심이나 하러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자고 할 만한 사람도 없었기에 그냥 혼자 먹으러 갔다.
평일이라 사람은 많이 없겠다 생각했는데 런치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매장은 이미 거의 꽉 차 있었다. 역시! 세상엔 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낮 시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오늘은 꼭 투움바 파스타를 먹겠어! 아웃백을 가겠어!' 하는 갑작스러운 생각을 나만 하고 있던 게 아닐 수도 있는 데다가, 수도권처럼 아웃백이 여러 지점 있는 곳도 아니고 딱 한 지점만 있는 지방이라서 이 시간에 그런 사람들이 몰려들 수도 있는 거였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간혹 1인이 오긴 하는 건지 1인이 먹을 수 있는 다소 협소한 좌석이 있어 직원분의 안내로 그곳에 앉았고 그렇게 내가 앉음으로써 런치타임의 매장은 만석이 됐다.
런치타임의 장점은 단연 세트화된 메뉴였다. 런치 이외의 시간에 가면 따로 주문해야만 먹을 수 있는 수프와 에이드가 나오고 탄산음료 리필 같은 혜택도 있다.
아무튼 나는 앉자마자 1년에 한두 번씩 먹던 대로 투움바 파스타, 양송이 수프, 오렌지 에이드를 선택하고 기다렸다.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아웃백의 시그니처인 식전 빵 부쉬맨 브레드와 수프를 먼저 제공해 주셨다.
빵과 수프를 먹으면서 내 가방에 있던 책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친구들 혹은 동료들과 함께 온 많은 사람들은 오가는 대화 속에 있었지만 유일하게 혼자 식사를 하러 갔던 나는 책의 이야기 속에 있어 혼자인 듯 혼자가 아닌 듯했다.
사람이 많아서 음식이 나오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나만 메뉴가 하나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빵을 다 먹기도 전에 투움바 파스타가 나왔다. 주문한 메뉴가 그렇게 빨리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리필 부탁한 탄산음료보다도 빠른 느낌이 드는 게 꼭 패밀리 레스토랑이 아니라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는 걸 못 견뎌하는 편은 아니지만 먹고 싶은 걸 빨리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스푼으로 받침을 하고 포크로 파스타를 한번 꽂은 채 돌돌 말아 한 입 가득 먹고 오물오물. 투움바 특유의 매콤함과 느끼함과 고소함이 동시에 퍼지면서 입 안에선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라도 흐르는 듯 웅장해졌다. 빠~ 빠바밤 빠~~ 밤! 입 속의 힘찬 BGM이 재생되면서 읽는 조르바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가족 구성원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혼자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혼밥, 혼술, 혼영 같은 혼자의 삶은 마치 트렌드처럼 자리 잡았다. 나는 함께하는 시간도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들을 거리낌 없이 하는 편이다. '가서 밥 먹고 영화 보고 그냥 똑같은 건데 그게 뭐라고?' 입장의 나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무언가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다. 혼밥 레벨 단계 같은 것.
패밀리 레스토랑에서의 혼밥 레벨은 7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최고 단계인 레벨 9의 술집에서 혼자 술 마시기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라 이 단계의 높낮이에 대한 개념도 사실상 없어서 잘 모르겠고 별 감흥도 없었다.
그런데 혼자 그것도 사람 많은 런치 때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투움바 파스타를 먹다니, 투움바 파스타를 먹으면서조르바를 읽다니! 주변인들의 "역시 넌 보통이 아니야." 하는 반응이 재미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나는 소위 말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작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두고 읽던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말이다.
최근 내 친구들은 나의 추진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것에 대한 추진력이었다.
어느 술집의 어떤 안주 사진을 보고 난 그걸 꼭 먹어야겠어! 말했더니 친구들은 "그럼 언제 한번 시간 맞춰서 가자." 했지만 나는 먹고 싶다는 말을 한 날에 이미 "늦어도 내일까진 가서 먹어야 한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것은 '돌았다'는 표현을 포함한 답이었다. 회사에서 컨펌이라도 받는 줄 알았다며 웃어대는 친구를 보고 나도 폭소가 쏟아졌다.
극 I 성향의 다른 친구는 먹어야겠다고생각하고 바로 먹는 추진력이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네 살 오빠인 그분은 그런 내가 멋있다고 언니 혹은 누나로 부를 때가 있다. 극 I가 보는 파워 E는 멋져 보이기도 하나 보다.난 그냥 하고 싶은 걸 바로 하고, 먹고 싶은 걸 바로 먹을 뿐인데?
생각해 보니 사람들 모두가 성격이 다른데 아무 고민 없이 그러기도 쉽지만은 않을 것 같긴 했다. 그렇지만 이 글을 빌어 말해주고 싶다.
혼자 뭘 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혼자라고 참지 마세요.참고 살 것도 많은 세상. 그것마저 참진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