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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Mar 22. 2024

휴게소 직원식당의 특별식

스무 살 알바생에게 남은 특별한 삼계탕

외동딸인 나는 일찍이 철이 들었고 독립심과 책임감이 강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을 알기에 어릴 때부터 다양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중에서도 힘들었다고 손꼽을 수 있는 곳은 바로 휴게소 식당이었다.


오전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휴게소 뒤쪽에 마련된 기숙사에서 씻고, 잠을 잤다. 기숙사라고 시설이 넓거나 좋은 것도 아니었고 공중목욕탕을 쓰고 넓은 온돌방에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열댓 명쯤 모여 자는 곳이었다. 그렇다한들 거의 매일 기절 수준으로 곯아떨어져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 다음 날이면 일어나 대충 씻고 바로 출근을 하는 패턴으로 생활했다.


휴게소 식당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칸칸이 자리 잡고 메뉴별로 음식을 파는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내가 일한 곳은 그런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의 식당이었다. 주로 화물차 등의 운전 업무를 보는 기사님들이 식사를 위해 들리던 곳이었는데 나는 머리에 털이 나고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식당에 몰려오는 모습을 처음 봤다.


식당의 메뉴는 덮밥이었다. 덮밥은 내가 생각해도 기사님들이 편하고 빠르게 더불어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메뉴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기사님 한두 분씩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리는 식권을 받았고 기사님들은 덮밥을 담을 접시를 받았다. 일단 접시 반쪽은 갓 지어 따끈따끈 김이 오르는 밥을 담았고, 남은 반쪽 공간에는 그 ‘밥’을 ‘덮’을 것을 한 국자 크게 퍼서 담았다. 먹고 싶은 종류의 메인 요리를 담으면 비로소 덮밥이 완성되었다. 제육 덮밥과 짜장 덮밥은 필수 메뉴였고 이외 김치 참치 덮밥이나 오징어덮밥, 불고기덮밥 등의 메뉴가 날마다 다르게 나왔다. 손님은 하루에 나오는 몇 가지 메뉴 안에서 선택해서 먹을 수 있었는데 내가 일했던 곳의 이모님들은 워낙 정이 많으셔서 양도 푸짐하게 담아주셨고, 무엇보다 맛이 있어 인기가 많았다.


우리 엄마보다도 연배가 높은 이모님들은 차분하게 일하는 나를 보며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말로 예쁘다. 어린애가 우찌 이리 열심히 살꼬~”


날 때부터 동그란 얼굴은 이모님들의 취향을 저격했고 생긴 것과 다르게 의외로 성실하고 행동이 빨라서 칭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일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집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힘들었다. 어떤 날에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울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경험이 거의 없었던 때라 힘들기도 했고, 그것과 별개로 진짜 힘든 일이기도 했다. 더운 여름에 종일 불가마 같은 주방에서 일해서 매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화장실을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땀을 흘리곤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토마토 같은 얼굴을 하고 일을 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특히 바빴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시간 식당에 기사님들이 빠지는 동시에 내 진이 다 빠졌다. 정리까지 다 끝내고 주방 사람들의 식사 시간. 나는 조그만 테이블 몇 개를 둔 직원 식당 자리에 걸터앉아 에어컨 바람을 쐬며 땀과 함께 흘려보낸 내 영혼을 천천히 되찾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장 이모님께서 내게 쟁반 하나를 가져다주셨는데 그 쟁반에는 뽀얀 국물의 삼계탕과 맛있는 반찬이 있었다.


“이모 오늘 무슨 날이에요?”

“오늘 복날 아이가. 아가 고생 많았제. 천천히 마이 무라.”


오늘이 복날이구나.

복날이라 우리 집에서도 삼계탕을 해 먹겠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울컥했다. 집에 가고 싶었다. 목구멍으로 뭔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눈구멍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숨을 한번 내쉬고 삼계탕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닭 육수 자체의 맛을 좋아했던 우리 집의 삼계탕과는 다르게 사골 국물 같은 맛이 있었다. 그건 또 그것대로 매력이 있었다. 울컥했던 감정을 추스르고 말 것도 없이 삼계탕에 집중했다. 후춧가루 하나 남김없이 깨끗하게 삼계탕 그릇을 비웠다. 그릇을 비우고 나서야 이모님들의 얼굴이 보였는데 다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잘 먹었습니다! 저 이제 뭐 할까요?!”


호기로운 나를 보며 이모님들은 “고마 좀 앉아 있어라. 먹자마자 힘을 뺄라 하노.” 하며 삼계탕만큼 푸짐한 미소를 보이셨다. 나라는 존재가 집 밖에서도 그만큼의 존중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날이다. 진짜 어른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나도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했다.


이건 내 나이 스무 살 적의 이야기다.

경제 개념이 별로 없던 나이에 돈을 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그해 여름에는 이모들의 마음이 듬뿍 담긴 특별한 삼계탕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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