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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28. 2020

밴더빌트와 이리 전쟁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36

미국의 철도 산업에 있어 가장 처음으로 떠오르는 이는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1794~1877)이다.


코넬리어스 밴더빌트  <출처: 위키피디아>


코넬리어스 밴더빌트(Cornelius Vanderbilt) 가문


그는 철도 산업의 효율성을 추구한 것은 물론 여러 철도 회사를 인수, 합병하여 자신의 대는 물론 자손에까지 이를 정도의 막대한 부를 쌓은 인물이다.


단순히 철도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의미보다는 그가 추진한 철도 경영의 경쟁력을 키워 쌓은 것이다.


철도 운영의 비효율성 제거, 저렴한 운임, 끝을 보는 추진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아울러 그의 아들(윌리엄 헨리 밴더빌트)과 손자까지 이어진 가문(밴더빌트 가문)의 영향력은 지금도 미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밴더빌트 대학교(테네시주 위치, www.vanderbilt.edu)는 미국 명문 대학교 중의 하나이다.



밴더빌트 대학교 로고  <출처: 위키피디아>


밴더빌트는 1794년 뉴욕에서 태어났다.


해운 사업의 시작


11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의 운송업을 돕다가 16살에 처음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주 업종은 해운 운송업이다. 1812년 미국과 영국의 전쟁 중에는 연방정부를 돕기도 했다.


1818년 자신의 사업을 접고 토마스 기번스(Thomas Gibbons)라는 증기선 선장 밑에서 일을 배우게 됐다.


11년 동안 증기선 사업에 관한 것을 배운 뒤, 착실히 모은 자본을 바탕으로 1929년 회사를 설립했다.



밴더빌트의 증기선    <출처: 위키피디아>


그의 사업 방향은 저렴한 운임과 쾌적한 운송 환경의 제공이었다.


삽시간에 허드슨강 운송 사업을 지배한 그는, 많은 돈을 받고 경쟁업체에게 권리를 넘겼다. 이러한 방식으로 몇 차례 사업을 확장했다. 1849년 골드러시를 맞은 해운 사업은 최절정에 올랐다.


당시 그의 별명은 제독(The Commodore)이었다. 한번 내뱉은 말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켰다.  


철도 사업의 도전과 인수합병


남북전쟁 중 철도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자신의 모든 해운 사업체를 매각하고 철도 사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추진한 것은 철도회사를 세우는 것이 아닌, 인수 합병 방식이었다. 그동안 쌓은 자신의 사업 노하우와 능력으로 인수한 철도회사를 개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 전쟁을 묘사한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철도 사업의 핵심은 적절한 운송비 대비 불필요한 낭비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익을 위해 회사의 숨은 잠재력까지 동원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철도 회사 인수합병 시,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전문 중개인들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자금력과 배짱이 좋았다.


하지만 대니얼 드루(Daniel Drew, 1797~1879)와 이리 철도 회사의 경영권을 놓고 벌인 일명 ‘이리 전쟁(Erie War, 1866~1868)’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대니얼 드루  <출처: 위키피디아>


대니얼 드루는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유명한 금융가 겸 이리 철도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이리 전쟁에서 드루는 사기와 같은 수법으로 주식을 팔아 밴더빌트의 돈을 챙겼다(판사를 매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밴더빌트와 합의하여 돈을 돌려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은 혼탁한 사회상의 일면이었다. 뇌물과 협잡, 사기와 거짓말 등이 모두 동원되었다. 당시 주 의회 및 시 의회, 판사까지 이권과 청탁연루된 것이다. 어두운 사회상 이었다.



철도 산업의 강도 귀족 묘사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드루는 1870년에 자신의 휘하에 있던 제이 굴드(Jay Gould, 1836~1892)와 제임스 피스크(1835~1872)에게 배신을 당해 큰 손해를 보게 됐다. 참고로 주식의 ‘물타기 수법’이란 단어는 드루에게서 발생된 투기 용어다.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 시대



철도 사업의 거상 윌리엄 밴더빌트  <출처: 위키피디아>


밴더빌트 사후에 그의 아들 윌리엄 헨리 밴더빌트(William Henry Vanderbilt, 1821~1885)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철도회사 경영에 나섰다. 타 철도회사를 인수, 합병했다.


그는 탁월한 경영능력과 재정 운영을 펼쳐 은퇴할 시기에는 기존 재산을 2배 이상 늘려 놓았다.


뉴욕 5번가 밴더빌트 자택 (1927년 철거)  <출처: 위키피디아>


박애주의자로 유명했는데, 밴더빌트 대학교 및 컬럼비아 내과·외과 대학 등 수많은 기관에 상당한 거액을 기부했다.


아울러 열렬한 예술 애호가이기도 했다.


뉴욕 5번가에 건물을 짓고 그곳에 자신이 수집한 그림과 조각품을 전시, 보관하기도 했다(1882년 완공, 1927년 철거됨). 그의 가문은 미국 상류사회에서 지금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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