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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우석 Apr 01. 2020

천변의 자기소개서 팁(1)-총론

대너리스 타가리옌의 스펙을 갖지 못한 당신에게

*주의! : 이 글에는 미드 <왕좌의 게임>에 관한 약한 스포일러가 있을 예정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소개서 작성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왕좌의 게임> 시청은 그중 하나라 할 것이므로, 아직 이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은 사람이 이 글을 클릭하였다면 뒤로 가기를 추천한다.




본인도 자기소개서를 많이 써봤지만, 남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한 적은 훨씬 많았다. 첨삭은 간단하게는 어색한 문장을 고치는 것으로부터, 크게는 거의 글의 구조 전체를 다 뒤엎는 형태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사실 디테일한 첨삭은 의미가 없고 처음부터 다시 써 와야 한다. 오늘은 그 본질을 관통하는 자기소개서 작성 팁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총론이라 썼지만 좀 과한 표현이고 다소 거시적인 관점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여기 '자기소개서가 대세를 뒤집을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이 존재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세를 뒤집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벼락을 맞은 사람이 다시 깨어나 또 벼락을 맞는 것 역시 가능하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로 대세를 뒤집겠다는 목표와 희망을 갖는 것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과연 '대세'를 기울게 할 스펙을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상당한 소수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는 이미 떨어져 있다' 류의 스펙을 가진 사람 역시 소수다. 결국 어딘가에 합격하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스펙이란 대동소이하며, 굳이 정량화한다고 하더라도 정규분포의 그래프를 그린다는 이야기다. 그럼 그 정규분포 안에서 다닥다닥 붙어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차이를 보여줘야 할 것이고, 그 수단으로 자기소개서는 상당한 위력이 있다. 그러면 일단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읽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는 순간 이미 그 자소서는 최소 상위 10% 안에는 들어간다.


많은 지루한 자기소개서는, 작성자가 자기소개서와 함께 이력서(내지 스펙을 증명하는 서류)를 함께 제공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으로부터 탄생한다. 이를테면 내가 이미 이력서에서 대학교 학점을 4.3 맞았고 장학금도 전액 탔다는 점을 적어 두었는데 자기소개서에 그 내용을 줄글로 또 쓰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데? 벌써 하품이 나온다.




<왕좌의 게임>에 등장하는 대너리스 타가리옌은 스펙으로 치면 말이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그 경우에는 자기소개서가 이력서의 복붙이어도 상관없다. 다시 말하지만 대세를 기울게  스펙을 가진 참가자인 것이다. 그래서 대너리스는 그냥 어디를 가도 이렇게 말한다(대략).


"나는 스톰본이고 타가리옌 가문의 대너리스고 머린의 여왕이고 안달족, 로인족, 최초인의 여왕이면서 칠왕국의 영주, 대초원 바다의 칼리시, 미사, 사슬 파괴자, 불타지 않는 용들의 어머니다"


근데 이게 내 자기소개서라고 치면,  

"나는 이 학교 졸업했고, 학생회장이었고, 무슨무슨 동아리 부원에, 숨마쿰라우데고, 봉사활동 중독자고 GPA가 얼마인 토익 시험의 파괴자이면서 한자 등 제2외국어 능력이 몇 급에 한국사 마스터다" 뭐 이런 셈이 되는 것이다. 내가 대너리스 타가리옌이 아니다 보니 이렇게 초라한 나열만 하게 되는데 그게 이미 제출 서류에 다 있는 내용이니 다시 읽을 필요 조차 없는 것이다.


심지어 저 대너리스 조차 시즌 6에서 도트락인들 앞에서 저런 자기소개서를 읊었다가 "넌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 집단에서는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지 저 스펙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칼 드로고의 미망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상대의 사과를 받아내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자기소개서는 자기 스펙 소개서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 일지를 고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나는 어딜 가든 튀는 사람'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 나는 존재감이 있고, 화려하다. 송곳이 아닐 수는 있지만 뭐가 됐든 주머니를 뚫고 나오는 유형의 사람이라는 점을 어필하고 싶었다. 그러면 내가 했던 많은 경험들, 스펙을 쌓기 위해 했던 공부나 준비 과정에서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점을 입증할 수 있는 사례들은 무수히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중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것들을 몇 가지 고르고 자기소개서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에 그 사례들을 녹이는 것이다. 그러면 너무나 작은 일들이라 여겼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상당히 거대한 일들이 발견된다. 그건 내가 함께 제출한 이력서 등 서류에 들어있지 않은 내용이다. 어? 내가 모르는 얘기를 하는군, 한 번 읽어나 볼까.


필자의 예를 들었지만, 그 가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나는 윤리의식이 남다른 사람이다. 나는 경쟁적인 사람이다.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협업에 능하다. 혼자서도 잘 해낸다 등. 그렇게 자기가 가장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지를 고려하다 보면, 어떤 집단에 자신이 잘 어울리는지도 알게 된다. 무분별한 복사 붙여 넣기 식 지원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용의 알(일단 이것부터 구할 수가 없다)을 들고 불타는 나무더미에 들어가서 꼬박 하루를 버틴 뒤에도 상처 하나 없이 살아 나오는(그리고 용이 어깨 위에 올라가 있어야 한다) 경험 따위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에서 박스에 담긴 채 팔리던 병아리 한 마리를 소중하게 키우고, 천수를 누리게 한 뒤에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는 정도의 경험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을 자소서를 통해 알림으로써, 나는 교감에 능한 사람인데다가 생명을 중시하고 따뜻하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점을 함께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런 '자기소개서'는 끝까지 읽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대세를 뒤집을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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