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우석 Jan 14. 2020

치팅과 사기의 경계

휴스턴 애스트로즈의 사인 훔치기 징계에 부쳐

공부를 못한 사람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초등학교-중학교 때의 나는 더 대단했다. 그래서 나는 꽤 여러 번 컨닝 제안을 받았다. 딱히 응했던 적은 없지만 컨닝을 하는 친구들은 항상 있었다. 걸리는 것도 봤고, 안 걸리는 것도 봤으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선생님들이 알면서도 봐준 게 아닌가 싶었던 장면도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쯤, 학원 선생님은 컨닝이 대표적인 콩글리쉬라고 알려줬다('커닝'이 옳은 발음이라는 것도). 'cheating'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는 것이었다. 치팅이 딱 맞는 표현인지도 의심스럽긴 했지만, 그 후로 나는 컨닝 페이퍼를 만들거나 컨닝을 도모하는 애들한테 "야 치팅 페이퍼가 맞는 말이거든?"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여러모로 나는, 재수 없는 놈이었던 것이다.


국내 MLB 팬들에게 가장 관심을 끌었던 오프시즌 뉴스는 단연 '류현진의 FA 계약'이었다. 조금 시야를 넓혀보면 어떨까, '게릿 콜의 양키스 입성' 이 떠오른다(그것도 투수 최초의 9년 계약으로). 하지만 역시 휴스턴의 '치팅'을 1순위로 두는 것이 맞겠다.


요는 이렇다. 강도 높은 탱킹으로 리빌딩을 완성한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지난 2017년 감격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다. 휴스턴 지역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고자 유니폼에 부착한 'HOUSTON STRONG' 패치는 감동적으로 회자됐다. 올 시즌은 기적의 워싱턴에게 패하며 월드시리즈 준우승에 그쳤지만, 휴스턴은 최근 3년 간 메이저리그의 트렌드를 이끈 팀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쌓아 올린 그들의 업적이 사실은 규정을 위반한 '사인 훔치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전 휴스턴 선수 마이크 파이어스였다.


사무국은 즉각 조사에 들어갔고, 마침내 오늘 징계가 결정됐다. 단장 르나우와 감독 힌치는 1년 자격정지, 구단은 5 밀의 벌금과 21년 드래프트까지 1, 2라운드 픽을 박탈당하게 되었다(르나우와 힌치는 징계 발표 즉시 해고되었다). 아직 가장 큰 징계를 받을 사람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2017년 휴스턴의 벤치 코치였고, 2018년 보스턴의 우승을 이끌었던 알렉스 코라다. 코라는 17년 사인 훔치기를 처음 고안한 인물로 밝혀졌고, 2018년 보스턴의 감독으로 취임하고는 바로 우승 시즌을 보냈다. 18년 보스턴의 치팅까지 고발된 상황이라, 이 조사가 끝나면 코라의 징계가 결정된다. 최악의 경우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치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반응은 다양하다. '징계가 약하다, 선수들은 왜 징계받지 않나(벨트란은 특히), 우승이 박탈되어야 한다'는 다수의 목소리부터 '최선을 다한 징계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휴스턴과 보스턴의 모든 업적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수의 목소리까지.


가장 강도 높은 비난은, 휴스턴의 모든 구성원들이(이제는 보스턴까지)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이 단어는 상당히 많이 쓰인다. 과거 약물 복용의 전력을 가진 선수들에게도 <'사기'꾼>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우리는 '사기'라는 단어를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하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사기'는 생각보다는 많이 협의로 통용된다. 이들이 정말 '사기'를 쳤다고 인정되었다면 아마도 사무국의 징계가 아닌 법원에서의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컨닝을 하는 애들한테 그건 치팅이야라고 말한 적은 있지만, 그걸 사기야 하고 말한 적은 없었다. flaud나 scam이라는 단어를 몰라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알았어도 그건 스캠이야 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무의식 중이든 의식적이든 간에 '치팅'과 '사기'를 구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스턴(과 어쩌면 보스턴)의 사인 훔치기가 엄밀하게 말해 '사기'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그걸 사기라고 표현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래서 간단하다. 이건 단순한 치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다. 사인 훔치기야 야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모두가 해왔던 것이고 혹자는 '사인을 빼앗기는 게 아마추어'라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모두가 하는 방식, 피하려고 하는 방식을 넘어서서 전자기기와 비디오를 이용하고 쓰레기통을 두드리고 휘파람을 불면서 조직 전체가 사인을 훔치려고 든 건 (알려진 바에 의하면) 2017년 휴스턴이 최초인 셈이다. 그 본원인 알렉스 코라에 의해 2018년 보스턴까지 그런 행위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명백한 피해자가 보인다. 모든 구단이 피해를 봤겠지만 직관적으로 그 두 시즌을 준우승했던, LA 다저스다.


그래서 약물러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행위는 '치팅'과 '사기' 그 경계의 어딘가에 있다. 그 경계에서도 보다 '사기'에 가깝게 있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우리는 배리 본즈의 홈런 기록과 로저 클레멘스의 엄청난 누적에 더 이상 경탄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록 옆에는 *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르나우나 힌치의 자격정지와 해고, 코라의 앞으로 있을 자격정지, 구단에 대한 벌금과 드래프트 픽 박탈 등 여러 가지 징계에도 불구하고,


아마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바라는 정의 구현은 그들의 월드시리즈 챔피언 글자 옆에 붙을 * 표시일지도 모르겠다.






이전 12화 천변의 자기소개서 팁(2)-각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