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위 즈음에

2020년 2월 12일

by 선량한해달

"책임님 저 좀 봅시다."


감사부문 유부문장이 티에프팀 정책임을 찾아왔다. 팀이랄 것도 없이 나홀로 작은 방을 지키고 있던 골방 지박령은 조금 반갑다. 감사부문의 방문을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정책임 본인도 흠칫 놀랐다. 환경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부문장님, 왜 굳이 여기서...?"


정책임은 건물 1층 카페로 자신을 불러낸 유부문장의 행동이 의아하다. 무엇이든 그것이 감사 관련 이야기라면 조용한 골방이 제격일 터이다. 아니면 18층 감사 부문 안쪽 방도 있다. 왜 굳이 모두가 보는 1층 카페란 말인가. 정책임은 빡빡한 전략처의 티를 미처 벗지 못한 탓으로 근무 시간 중 카페에서의 회의가 불편하다.


"소문나죠."

'...아!'


깨달음과 함께 역시 감사부문은 다르구나 생각한다.

"아, 저는 노는 걸로 오해받을까 봐."

"...아!"


깨달음은 언제나 상호적이다. 유부문장은 드러나지 않는 일을 하는 정책임의 입장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본다.

"미안해요. 기밀 티에프 생각을 못했네."

"아뇨, 제가 죄송합니다. 워낙 대놓고 일만 하시는 분들이랑 있다 보니...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냐, 감사가 특이한 거지, 뭐. 그리고 그거 본인 특성일 수도 있어요. 친화력이 좋으시잖아."

"...죄송합니다."


친화력이 좋을 리가 없다. 친구라곤 동떨어진 18층 감사실의 지아 책임 뿐이다. 감사실의 매서운 눈도 결국은 제 시야 안에서만 성립하는 것이다. 친화력이라는 낯선 단어를 마주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정책임에게 뜻밖의 질문이 날아든다.


"신준우씨 알아요?"

"네?"

"같이 입사했던데."


너무 오랜만에 듣는 동기의 이름이다. 본사 동기들이 모두 떠나고 현장에 남은 유일한 동기다. 현장과의 교류를 엄금하는 송수석 방침 덕에 수년간 남처럼 지내온 참이다.

"아, 네. 동기는 동긴데..."

"동긴데?"

"...왜 ...그러시죠?"


유부문장은 말을 아끼는 정책임의 모습에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나 싶어 잠시 느슨함을 주기로 한다. 고개를 살짝 젖히며 급히 어깨를 풀더니 다리를 꼬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다. 정책임의 물음표 담긴 눈동자가 꼬이는 다리를 따라 유부문장의 발끝에 머문다. 그러자 시선을 의식한 부문장이 발끝을 살짝 흔드는 것이다.


"색 괜찮아요?"

"네? 아, ...네. 구두 예쁘네요."

"우리 딸이 아르바이트해서 사준 거."

"따님, 아직 초등학생... 아니셨어요?"

"집에서 두 달 동안 알바를 했더라고요. 음식물 쓰레기 담당."

"아아, 전 또 뭐라고. 아동학대로 신고할 뻔했네요."

"이 봐, 이 봐, 정책임도 빡빡하시다니까."

"아유, 부문장님.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어린이는 우리들의 미래거든요."


어색한 분위기가 스르르 풀린다. 오랜만에 이야기 상대를 만난 정책임은 농담도 던져보며 그간 굳어 있었던 입을 풀기로 했다. 하지만 입을 열어 가벼운 말들을 흩뿌릴 때마다 잠시 전 언급되었던 무거운 이름이 문득문득 혀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


갑작스러운 정적이 흐른다. 두 사람 모두 이 정적을 걱정했다. 어쩌면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용건 없는 대화가 퍽 적성에 맞지 않는 둘이다. 감사와 전략이 만나 가벼운 대화가 이어질 리 없다.

"...준우형, 무슨 일 있어요?"


마시던 커피를 툭 내려놓은 유부문장이 꼰 다리를 풀더니 어깨너비의 무릎에 양 팔꿈치를 괴어 숙인 자세를 취한다. 코 앞에서 기도하듯 뭉친 두 손이 단단하다.


"친해요?"

"아시다시피.. 전 전략 가면서 노조에 버림받은 몸이라서요."

"음."


"왜요? 뭐, 사고 쳤어요?"

"..."

"그럴 사람 아닌데? 멋을 좀 부려서 그렇지 되게 조직인이에요. 되에~게."


가만히 듣던 유부문장이 눈을 세차게 깜빡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수차례 끄덕끄덕 하더니 시선을 커피에 고정한 채로 대화를 이어간다.


"거기가 핵이더라고."

"...네?"

"본인이 구린 건지, 구린 놈 구하려는 건지..."

"...아."

"노조는 처음부터 한 건가?"

"아뇨, 아무도 안 하려고 하니까... 형님들이 막내 시킨 거죠. 남자들 중에 제일 어렸나 그래요."

"그랬군요."

"이쪽에 가족 있다는 말 들어본 적 있어요?"

"이쪽요?"

"뭐, 저쪽 공사라든지. 교통 쪽이나, 도로 쪽이나, 공단이나. 어쨌거나 공자 붙은 쪽에 연이 있나 싶어서."

"...글쎄요. 전 현장에서도 몇 달 빼고는 일근직이었어서 스케줄 타는 동기랑은 말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철저하구만!"


"..."


정책임은 저 날카로운 한 마디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궁금했지만 지아도 아닌 부문장을 앞에 두고 발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야 중부본부 시절에는 저쪽 공사 누구 아들이라더라, 현장 높은 어르신의 조카라더라 하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동기 모임에서도 구석에 앉아 말없이 술만 꿀떡 마시던 준우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신입사원 교육 중 발생한 작은 이벤트로 우연한 기회에 친해져 오빠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다. 교육 기간 중 남녀 숙식이 별도였던 탓에 남자 쪽 소식은 통 알 수가 없었고, 발령 이후에는 각 지역으로 흩어졌다. 그마저도 이제는 대부분이 이직 루트를 타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둘 뿐이다. 그 둘마저 본사와 현장으로 갈갈이 나뉘어 접점이라고는 없는 사이인 것이다.


"아, 아니아니, 책임님 말고. 준우라는 사람."

"...네."

"막내였구만."

"..."


대화 사이사이에 혼자 많은 생각을 하는 듯한 유부문장이다. 정책임은 눈앞의 중년이 대체 무슨 의도를 갖고 이런 대화를 시도하는 중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불편하다.


"미리씨는 어때요? 잘 지내요?"

"네? ...아, 네. 언니야 뭐... 아시잖아요. 워낙 혼자서도 잘하는 분이라."


암흑 같던 동기 추궁의 시간이 지나고 강주임 이야기로 화제가 전환된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인다. 미리 언니의 이름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치. 잘하지. 강대리가. 참 잘해. 눈 똥그랗게 뜨고 몇을 잘라냈는지..."

"..."


한숨 돌렸던 정책임이 급히 가라앉는다. 심문이 끝났나 싶었더니 또다시 튀어나온 알 리 없는 강주임의 과거다. 알고 싶다. 알고 싶지 않다. 알고 싶...은가? 잊을 만하면 사람을 괴롭히는 저쪽 공사 시절 강주임 이야기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쯤이면 얽히고설킨 그들의 관계를 대강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나, 알려주는 게 예의 아닌가 생각한다. 그때였다.


"거기가 감사였잖아."

"네?"

"감사팀이었다고. 강대리가."

"아. ...아, 아."


뇌가 절기 시작한다. 분명 강미리 주임은 지난 공사 시절 기획이니 전략이니 하는 일을 해왔다고 했다. 거기서 대리를 달았고, 모르긴 해도 공사 출신 아저씨들과 얽히고설켜 합동인가 뭔가 하는 티에프를 하다 안 좋은 일을 겪고 퇴사했다. 정책임은 기억을 되짚다 본인이 알고 있는 강미리라는 사람의 과거가 지나치게 단편적임을 깨닫는다. 그러다 스스로를 돌이켜본다. 나만 해도 짧은 기간 동안 소속이 여러 번 바뀌지 않았던가. 중부 본부에서 전략처로, 전략처에서 영문 모를 티에프로.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강미리는 그 시절 팀제였던 공사의 작은 시간의 축 속에 감사팀원으로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시간과 인지의 문제다.


"언니도 참 파란만장하시네요."


식어가는 커피를 이제야 들이켜는 정책임을 가만히 훑어보는 유부문장이다. 비스듬히 풀려있는 자세와 꼰 다리는 이제 아무런 시선도 느끼지 않는다. 두 사람의 카페타임은 겨우 긴장이 없는 진정한 커피타임이 되었다.


"좋은 말이네."


유부문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 커피를 들어 마시려다 얼굴 아래로 머그를 내린다. 손목이 꺾인 모습에서 머그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정책임, 그거 알아요?"

"네?"

"닮았어요. 정책임이랑. 강대리랑."


언뜻언뜻 스스로도 강주임의 과거와 나의 현재가 닮아있다고 느끼던 참이다. 정책임은 능청스레 한 마디를 보탠다.


"멋진 분이랑 닮았단 소리도 듣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감사합니다."


보통이 아닌 정책임의 대꾸에 다시 머그를 들어 올려 소주를 마시듯 남은 커피를 호탕하게 목구멍에 쏟아붓는 유부문장이다. 어딘지 모르게 속이 조금 후련해진 정책임은 기분 좋게 남은 커피를 즐기고 있다.


"그래요. 신준우씨 얘기는 없던 걸로. 알죠?"

"네, 그럼요. 제가 뭐, 드린 말씀이나 있었던가요?"

"음. 뭐. 없지."

"들어가십쇼."


자신의 머그를 들고 떨어진 커피 방울을 닦아내는 유부문장의 모습이 유독 인간답다. 정책임도 서서히 일어날 준비를 한다. 그러다 결심한 듯 카페 쓰레기통으로 한 보 먼저 이동하려는 유부문장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부문장님이 보시기에. 강대리 이야기는 희극인가요, 비극인가요?"


2020년 2월 12일 수요일 맑음


<감사부문 유부문장> 믿어도 될까?

보통내기는 아니고. 책임질만한 일은 절대 안 할 스타일이야.


<티에프팀 정책임> 믿어도 될까?

보통 아저씨는 아니고. 좌천될 만한 일을 할 위인은 절대 아니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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