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의 시작

2020년 2월 14일

by 선량한해달

'정체불명 전염병 세계 확산, ㅇㅇ공사 등 36개 공기업 채용 축소 불가피, 청년 취업난 심화 우려'


지난 두어 달 도시괴담처럼 인터넷을 타고 떠돌던 바이러스 소식이 드디어 공식화되었다. 괴담이 아닌 실제 상황이다. 진작 마스크를 챙겨 쓰고 다니던 강주임은 오늘부터 '별난 사람'에서 '바른 사람'이 된다.


"거, 응? 우리 미리씨처럼 말여, 응? 철두철미허게 쓰라 이거지. 이거 장난이 아녀, 심각허다이?"


'지만 살겠다고 마스크까지 챙겨 쓰고 다니는 꼴이 아니꼽다며?'


이책임은 겉으로는 넵을 외치며 속으로 지난 술자리를 떠올린다. 술이 들어가자 대뜸 막내 주임을 향해 비난을 퍼붓던 송수석이었다. 강주임이 편하지는 않지만 없는 자리에서 마스크 쓰고 다니는 것으로 욕하는 건 아니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다. 그게 며칠 만에 칭찬으로 변하다니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강주임은 마스크 많지 않아?"

"네?"

"나 오늘 세종 가야 되는데 개인 마스크 있으면 그거 나 주지? 차 타면 사람 붐비는데, 쫌 그래."


이 어이없는 마스크 동냥은 대체 무언가 싶지만 입씨름도 귀찮다. 1인 1일 1개로 제한된 마스크는 이렇게 쉽게 누군가에게는 1일 2개가 되는 것이다. 내 돈 드는 막내 인생이란 어딜 가나 다 같은 법이다. 지난달 중국 유학 중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 세 박스나 사둔 마스크다. 당분간은 그걸 사용하면 된다. 강주임은 돈으로 기분을 사기로 한다. 기왕 세종 가는 거 빨리 떠났으면 좋겠다.


"2월 20일, 뭔지 알아요?"

"네?"


코트를 주섬주섬 주워 들고 세종행 차 시간에 맞춰 나갈 준비를 하던 이책임의 뜬금없는 질문이다.

"으응~ 모르는구나?"

"..."

"어? 진짜 모르나 보네?"

"..."


사방으로 뻗친 곱슬머리에 대충 왁스질을 해대며 건성으로 던진 이책임의 말 한마디에 온 신경이 곤두선다. 날짜에 민감한 강주임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뭘 잊어버렸...나봅니다."

"..."

"책임님, 그 날... 무슨 마감인가요?"

"으음..."


듣는 둥 마는 둥 대강 자리 잡힌 머리에 만족하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거울을 살피더니 휙 하고 가방을 집어 강주임 뒤로 나서는 이책임이다.


"나 올 때까지 알아놔요. 숙제."

"..."


'뭐 저런 새*가 다 있지.'


쿨하다기엔 너무나도 짧고 통통한 뒷모습에 성이 받친다. 그보다 20일. 20일이다. 무언가 놓쳤다. 땀이 바짝 난다. 정책임이 빠진 후로 업무 로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날짜 하나 놓치는 건 일도 아닌 상황이다. 알아내야 한다. 저 능구렁이 같은 놈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알아내야만 한다. 강주임은 재빨리 주변을 살핀다. 과연 세종행이 많은 날답다. 재무 쪽은 전원 이석, 인사도 18층 감사 회의에 들어갔다. 주변이 텅텅 빈 이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살곰 의자 바퀴를 굴려 가장 먼저 이책임의 달력을 살핀다.


'더러운 놈!'


벗어둔 신발의 향취와 먹다만 연유라떼의 끈적한 내음이 마스크 속 코 점막을 공격한다. 책상 위는 산만의 정수다. 알 수 없는 피규어와 서류가 한데 섞여 있다. 달력을 자세히 보려 책상을 짚자 끈적한 액체가 손에 묻어난다.


'...'


강주임은 정말로 화가 나면 욕도 안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다. 그의 책상은 지나치게 더러웠고, 그의 달력은 심히 깨끗했다. 점 하나도 찍히지 않은 달력에서 얻을 수 있는 단서는 없었다. 살짝 주변을 살핀 강주임은 옆으로 이동한다. 송수석의 자리다.


없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 서류 한 장, 펜 하나, 달력조차 없는 자리다. 이 자리에 서식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자리다. 책상 아래 무한히 진열된 자기계발서가 애처롭게 그 옆의 슬리퍼 내음에 쩔어간다. 이 곳에도 단서는 없다.


강주임은 송수석의 자리에서도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자 아랫것들의 자리와 직각을 이루며 두 배의 크기로 펼쳐진 강부문장의 자리를 눈으로 탐한다. 방금 전보다 훨씬 오래 주변을 살핀다. 감히 부문장의 자리를 뒤질 용기가 나질 않는다. 이책임이나 송수석 자리의 탐색 정도는 평상시에 지은 그들의 죗값을 생각하면 죄의식 없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접점이 거의 없는 부문장의 자리는 다르다. 너무나 먼 사람이다. 20일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자리를 탐색해도 되는 걸까? 만약 누가 이 장면을 본다면 신고를 당해 감사부문 신세를 진다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런 고민들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와중에 강주임의 몸은 이미 의자 바퀴를 떠나 강부문장의 데스크 앞에 와있었다.


화살표가 가득한 공정표가 기다란 파티션을 가로지른다. 모자이크와 무엇인가를 가려놓은 포스트잇, 지나치게 작은 글씨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조차 않게 만드는 공정표다. 질리는 풍경에 압도당하는 와중에도 강주임의 눈은 오른쪽 구석에 세로로 틀어박힌 삼각형의 탁상 달력에 가서 박힌다. 저것이다. 저것을 봐야만 한다. 20일이면 목요일. 보기 어렵지 않다. 살짝만 빼면 된다.


'!'


숫자 20 주변에 빨간색 볼펜으로 그려진 동그라미가 눈에 확 든다. 그리고 그 순간,


"강대리 뭐해?"

"!"


이 애매한 대면을 대체 어찌해야 할지 1초에 수백 번을 고민한 끝에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기태림 수석이 서있었다. 약간의 안도와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닳아오른다.


"강대리가 안 하던 짓을 하고."

"아, 팀장, 아니 차장, 아니 수석님."

"흡, 뭐야 왜 이래? 강대리, 진짜 뭐 죄 졌어?"


기수석은 짙게 탄 율무차를 한 손에 들고 강부문장의 긴 책상에 걸터앉는다. 자연스레 올라가는 한쪽 다리가 반가부좌를 튼다.


"아뇨. 그게..."


변명을 할수록 꼬이는 상황이다. 강사원은 솔직히 털어놓기로 한다.


"아아, 20일? 난 또 뭐라고."

"아세요?"

"우린 알지. 공사 출신들은 다 알걸? 내 또래면."

"...아. 죄송합니다."

"왜?"

"아니, 그게... 일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날짜를 놓쳐서. 너무 바쁘다 보니까 이런 실수를... 아니, 실책이죠. 그러니까..."

"그니까 뭐가?"

"네?"

"...뭔 소리야?"


두 사람은 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대화에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저... 20일."

"응, 재희 생일."

"네?"

"유재희 생일이라고. 감사부문장."





2020년 2월 14일 금요일 흐림


<기재부문 강주임> 개새*

내 기필코 죽인다. 저 새* 못 죽이면 저 새*의 새끼라도 건드린다. 왜 이런 일 같지도 않은 일로 사람을... 하, 왜 눈물이 나지? 거지 같은 새* 하나 때문에 몇 년 만에 화장실엘 다 와서 짜고 있네. 밖에 저 여자는 누군데 아직도 안 나고 서있어. 들어올 때 우는 거 본 건 아니겠지? 나도 참, 나이 먹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왜 그 때 버티지 못했을까? 왜 그 때 그 자리에서 지르지 못했을까? 왜 그 때 죄 없는 내가 도망쳤을까? 왜 돌아왔을까? 그 때... 그 때 도망치지 말고 다 물어버렸어야 했는데. 그 때 다 잡았어야 했어. 그 때...


<감사부문 이책임> 두 번이면 우연이 아니지

최유빈이에 가려서 몰랐는데 저것도 참 인사를 안 하네. 민이 언니한테는 싹싹하게 잘한다더니. 뭐야, 혹시 사람 가려? 멀쩡히 화장실에 사람이 있는데 그걸 휙 지나친다? 거의 눈도 마주친 것 같은데?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공사빨 믿고 대든다더니 진짠가보네. 가만있어봐. 본부장 자녀 강모씨가 혹시 저건가? 기분 더러운 건 답도 없다고... 기다려도 안 나오니 오늘도 인사받기는 글렀고. 사적 응징이라도 해야지. 우리 후배님들 다 착하신데 꼭 저런 게 한둘씩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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