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극상의 원리

2020년 2월 17일

by 선량한해달

"..."


아침부터 싸늘한 기운을 내뿜는 강주임을 애써 모른 척하며 여유로운 아침을 누리는 이책임이다. 회의 날 오전은 송수석이 부재인 이유로 마음이 한결 가볍다. 숫자에는 빠삭하지만 글자로 노는 부서의 일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다. 보고서를 쓰는 족족 돌려받기 일쑤다. 대체 왜 보고서의 줄간, 자간에 그렇게 신경들을 쓰고 앉았는지, 피 같은 시간이 아깝지도 않은지 등의 생각을 하며 습관적으로 MTS를 들여다본다.


'하아..'


"하이고오, 바닥을 치는구나. 바닥을 쳐."


한숨을 깊게 내쉰 이책임은 책상에 이마가 닿을 듯이 허리를 굽힌 자세로 몇 초간 움직임이 없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허리를 곧추 세우고 타이핑에 열중하고 있는 옆자리 강주임과 대조적이다.


"거, 미리씨는 주식 안 해요?"

"... 네."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시간을 두고 날아온 단답에 기분이 상한다. 평소에도 싹싹하지 않은 강주임이지만 오늘 유독 기분이 나쁜 것은 하락장 때문이리라.


"좀, 얼굴도 좀, 응? 보고 웃고 그럽시다. 죽상으로 그러고 있어?"

"..."


이 해로운 놈과는 말을 섞지 않겠다 다짐이라도 한 듯 강주임의 손가락이 날기 시작한다. 키보드의 타음이 한층 풍성해진다. 손가락만큼은 운동선수들이 말하는 '존'에 들어선 것 같다.


"하, 참."


이책임은 작정했다는 듯 굽은 자세로 고개를 삐딱하게 돌리고는 강주임을 힐끗 노려본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제는 아예 책상에 상체를 붙이고는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나 좀 봐달라는 듯이 노골적으로 고개를 파닥인다.


'타닥타닥타닥.'


'파닥파닥파닥.'


타닥과 파닥 사이의 균형이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이책임은 이 균형을 깨려 기어코 어깻죽지까지 흔들며 파닥에 파격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기재부문 뒤가 벽인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 기괴한 모습을 뒤에서 본다면 그게 누구든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닥타닥타닥... 탁!'


이윽고 균형이 깨지고 강주임이 손을 멈춘다.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손만이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냉기가 주위를 감싸고돈다.


"어우야, 사람이야 드라이아이스야 뭐야. 나 소름 돋았잖아. 어우."


능청인지 빈정인지 쉬지 않는 입이다. 강주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다.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지난 금요일 이 인간의 만행이 부른 화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다. 가능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다. 직장생활 조용히 하다 떠나는 것이 강주임의 유일한 목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주변이 그를 가만두지 않는 것이다.


"소름은 제가 돋죠."

"응? 왜에?"

"감사부문장님 생신... 이시라면서요. 20일."

"...어? 어떻게 알았어요? 와 역시 대단하네, 난 지아 책임이 말해줘서 겨우 알았지. 아, 맞다. 미리씨도 그쪽 공사 출신이지? 그런 거 알면 나도 좀 알려주고 그래요. 자기만 혼자 알고 그러지 말고. 별 거 아니라도 그런 거 알아내려면 고생고생을..."

"몰랐습니다."

"응?"


시선을 마주하면 욕이 튀어나올 것 같아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강주임이다.

"부서도 다르고 층도 다른 분입니다. 왜 생일을 알아야 하죠?"

"응? 뭐 ...뭐야?"

"제가 할 말입니다. 대체 뭐 하시는 거죠?"


이 두 사람의 인지에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업무 외의 모든 부분에 조심인 사람과 업무 외의 모든 영역이 이벤트인 사람. 상극이 직급과 경력이 뒤바뀐 채로 옆자리에 앉아 일을 한다는 것은 거대한 재앙이다.


"아니, 응? 회사에 부문장님들 생신 챙기는 게 당연한 거 아냐?"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럼 뭔데? 가만 보면 미리씨 이상한 데가 있어. 그 때 수석님 승진 파티도 안 하려고 하고."

"그런 적 없습니다. 선물이 과하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게 그거지, 차암나!"


이책임은 송수석과 사이가 나쁜 감사부문장까지 챙기고자 한다. 사이가 특히 나쁘지 않은 부문장이라면 더더욱 챙긴다. 강주임은 챙김의 선을 지키지 않는 것을 문제 삼는다. 특히 이번 경우에는 사람을 희롱한 것에 분노가 배가 된 것이다.


"아니, 사람이 뭐 그리 빡빡해?"

"사람이 뭐 그렇게 가벼우십니까?"

"뭐야?"

"20일이 감사부문장님 생신이라고 말씀하셨으면 그걸로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날인지 알아두랬잖아."

"그렇게 말씀하셔서 두 시간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에? ...왜에?"

"숙제라고 하셨죠?"

"내가?"

"정대리님 떠나시고 업무 로드가 심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연히 업무 마감일이라고 생각하죠."

"아니, 그걸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문제 있는 거 아냐? 내가 기억도 못 할 정도면 건성으로 한 말 아니냐고!"

"기억도 못할 말을 왜 하시는 거죠?"


입장 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장난과 농담의 기준이 다르다. 이미 틀린 사이다. 기재부문의 이 두 사람은 영원히 어우러지지 못한다. 과거 전략처의 원만함은 송수석과 정책임의 보이지 않는 긴장 상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내향형 인간이다. 강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찰이 팀에 균형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책임이 빠진 지금, 송수석의 주니어를 자청하며 위아래로 소통을 막는 이책임 덕에 송수석은 고립되고 강주임은 잔업과 감정을 담는 쓰레기통이 되어버렸다.


"인사는 왜 안 해요?"

"네?"

"인사 안 한다고 소문이 자자해. 공사 경력 길다고 그러나 본데 그러면 아무도 안 좋아해."

"..."


'탁!'


강주임이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노트북을 덮고 서서히 일어선다. 의외로 큰 키에 머리끝부터 내리꽂는 찬바람이 이책임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강주임은 마스크의 코를 잡아 위아래로 살짝 조정하더니 몸을 돌려 이책임을 내려본다.


"내가... 사회생활 10년 하면서... ...인사 안 한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태연한 듯 매섭게 찌르는 한 문장에 무신경한 이책임도 살짝 움찔하고 말았다.


"그럼,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겁니까?"

"그런 적 없다고."

"그러니까 거짓말을 했다는 거네요."

"그런 적 없다고."

"그러니까 제 아내 될 사람이 거짓ㅁ..."

"그런 적! 없다고!"


"어이구야, 우리 이책임님이 말을 참 못 알아들으시네."


지지 않으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짝 긴장해 입으로만 대꾸하던 이책임 뒤로 무게감이 감지된다. 정확히 말하면 강주임의 뒷편이다. 어디부터인가 대화가 꼬여간다고 느끼고 있던 차다.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에서 폭발한 강주임이 당혹스러워 윗사람으로서의 체면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강대리가, 올해로 십 년 찬가, 십일 년?"


기수석이다.


"그 뭐냐, 응? 미리씨가, 응? 형 기획 떠나고 바로 입사했으니께, 십 년은 허지?"


송수석이다.


급작스레 그림이 바뀐다. 서 있는 세 사람과 굽어 앉아 정면만 바라보고 있는 이책임. 세 사람 모두 자그마한 이책임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책임은 '그래도 내가 책임인데, 과장인데.'를 되뇌며 먼지 같은 자존심을 붙들어보지만 이들 앞에서는 더 이상 직급이나 경력으로 싸울 수 없다. 새삼 강주임을 주임으로 부르지 않는 회사 사람들의 사정이 눈에, 몸에, 머리에 든다.


"이래서 우리 회사가 문제라는 거야. 뽑을 땐 경력 산정을 해준다 해놓고 안 해주니까. 이 꼴 나는 거 아냐."


기수석의 작심 발언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이책임이다.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지. 여서는, 응? 여어가 책임인데? 응?"


큼큼거리며 슬리퍼로 바닥을 휘젓는 송수석이다. 멋쩍은 듯 이책임 편을 슥 들어주고는 자리로 가 앉는다.


"강대리, 다녀와. 아까 정책임이 오늘의 커피 맛있다 그러대."


참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숨을 몰아쉬던 강주임이 마스크 위치를 한 번 더 고쳐 잡더니 목례를 하고 돌아 나선다. 평소와 달리 사무실 슬리퍼를 신은 채로 밖으로 나서는 강주임이다. 주인 잃은 5cm 힐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강아, 잘 좀 하자."


기수석은 강주임의 의자에 앉으려다 남의 부서 일에 너무 끼어들었나 싶어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는 자리를 뜬다. 평소와는 반대로 강주임이 자리를 비우고 송수석과 이책임이 남아있는 이 그림이 어색하다. 송수석은 송수석대로 이책임은 이책임대로 할 말이 없다.


"그게, 별 건 아니고요..."


이책임이 입을 열자 송수석이 대뜸 한 마디를 보탠다.


"거, 너무 그러지 말어. 보기 안 좋아."

"...네."


송수석은 송수석대로 당황스럽다. 정책임과는 한 번도 부딪친 적 없었던 강주임이다. 여자들이라 그런가 빨리도 친해진다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송수석에게는 정책임보다 이책임이 훨씬 더 대하기 편하고 다루기 쉬운 말이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이책임하고만 일을, 아니 말을 섞고 있었다. 강주임은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송수석도 공사에서 오래 일한 강주임이 업무 면에서 이책임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안다. 사업 심의나 통계 반출입에 있어서는 나보다도 더 실무 감각이 뛰어나리라. 신임 주무관들과도 두루 친하다. 강주임은, 아니, 강대리는 문제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 눈앞에서 난 사단을 보니 의외로 놓치고 있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두 사람의 합이 그렇게나 안 좋은 건가? 서른이 넘어서들 인사 타령이 웬 말인가.


"미리씨헌테도 나중에 내가 따로 말할 거고, 응?"

"네."


퉁명스러운 '네'가 영 미덥지 못하다. 이미 갈 때까지 간 건 아닌지 염려된다. 타기 쉬운 말이 반드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주지는 않는다. 만약 버려야 한다면 누굴 버려야 할까? 작은 불화를 목격한 것으로 송수석의 귀여운 뇌가 먼 미래까지 내다보며 진동하기 시작한다.


"근데, 수석님, 아니, 차장님, 아무리 그래도 인사 안 하는 건 아니지 않슴까? 그리고 기수석님도..."

"..."

송수석은 온몸이 차갑게 식는다. 바퀴를 끌어다 이책임 옆에 바짝 붙이고는 밀담이라도 나누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이책임,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응?"




2020년 2월 17일 월요일 천둥번개


<중부본부 신위원> 이번엔 경력재산정이다 이것들아

끝까지 가보자고. 재산정받으면 현업도 대리, 과장, 아니, 책임이 수두룩하다 이거거든. 수당 아끼고, 임금 아껴서 누구 뱃속 채웠는지 모를 줄 알고? 줘야 할 걸 못 주겠다면 같이 나눠라도 먹자 이거야.


<시설관리부문 기수석> 너무 오래 살았나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 살다 보니 별 꼴을 다 보는구만. 내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지. 보강이가 시원시원 잘 할 줄 알았더니 것도 아닌가? 정책임도 그리 되고... 아랫 놈들은 참 알기가 어렵단 말이지. 나도 이제 그만 내 자리 찾을 때 됐어. 찾아와야지. 잘 해먹었으면 돌려도 줘야지, 강짱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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