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의 독서
한 줄 소감 :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그의 독백을 통해 비추는 우리의 삶
위 사진으로 찍은 이 책의 겉표지를 넘기면 이 책을 구매한 날짜와 아버지의 서명이 적혀 있다. 이 책은 1997년도에 나의 아버지가 읽으신 후로 줄곧 부모님 댁 책장에 꽂혀 있었다. 수많은 책들로 가득한 본가를 서성이면 중고서점에 온 것만 같아 항상 기분이 들뜬다. 몇 주 전 부모님 댁을 방문하여 집안 여기저기를 서성이다가 골라든 책이 바로 이 얇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소설 『향수』로 유명한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인데, 그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바로 『콘트라베이스』라고 한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희곡이며, 1인 모노드라마 각본이다. 주인공인 국립 관현악단 소속의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자신의 거주지 안을 서성이면서 혼자 이런저런 얘기를 주절대는 형식인데, 주인공의 이름도 주어지지 않으며 콘트라베이스 외에는 딱히 특별한 무대장치도 없다. 주인공이 맥주를 홀짝이면서 음악, 악기, 자신의 삶에 대해 두서없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독백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자연스레 알게 된다. 콘트라베이스는 현악기 중 가장 큰 덩치를 자랑한다. 하지만 무대에서 도드라지지 못한다. 독주도 불가능하며, 오케스트라의 맨 뒷줄인 3열 한 구석에서 열심히 저음을 깔아줄 뿐이다. 들고 다니기에도 버겁다. 집 안에 두기에도 거추장스럽다. 이 큰 악기를 이고 지고 살아가는 주인공은 국립 관현악단 소속의 공무원으로서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무력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잿빛 삶에서 연주하는 것이 하필 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콘트라베이스인 것이다. 독백을 하며 이따금씩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고 혼자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방 안에서일 뿐이다. 무대에서 괴상한 짓을 하여 이목을 끌어볼까 상상하지만 그것도 그저 상상으로 그칠 뿐이다. 도입부에서는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한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지만 다른 악기와 음악가들에 대한 질투나 시기를 은연중에 드러내기도 하는 주인공은 마음속을 가득 채운 자신의 소심함과 답답함, 무력감과 공허함, 바닥나버린 자신감과 낮은 자존감, 남들 몰래 품고 있는 욕망을 자신의 삶과 콘트라베이스를 통해 보여준다. 그걸 보면서 독자는 독자 스스로 연주해 왔던 각자의 콘트라베이스를 바라보게 된다.
이 희곡은 아주 짧고, 그것도 별다른 기교 없는 독백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탁월하다.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크고 버거운 악기를 아무리 열심히 연주해도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와도 같은 인생, 그리고 그러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라는 자아를 가진 개인으로서 평소 느껴왔던 감정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종국에는 위로를 느끼게 된다. 우리 모두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