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갔나 나의 낭만
천사는 눈 양탄자를 깔아 두고
옛 친구를 기다렸다
19층에 사는
10살 갈색 강아지
날개 없이 지낸 지 꽤 오래된 친구라
뛰어놀던 곳을 잊어버렸을 테니
그곳이 생각나게끔
하얗고 소복하게 평평한 양탄자를 준비했다
혹시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얘기해 주려고
같이 사는 인간이 내려놓자마자
강아지는 뛰기 시작했다
천사는 하늘을 나는 기분을 주려고
강아지를 슬쩍 들어 올렸고
웃는 게 꼭 예전 모습 같아서
돌아오면 주려 했던 날개를 꺼내려는데
"삐삐야 거기는 안돼"
라며 인간이 소리쳤다
갈색 강아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인간에게 갔다
아직은 아니군
천사는 양탄자를 슬슬 말아 올렸다
요즘 눈이 참 많이도 내리죠? 하루 건너 하루 눈이고 빙판길이고 그걸 막기 위해 뿌려놓은 염화칼슘까지 엄청나잖아요. 맨발로 걷는 강아지에게 염화칼슘은 화상을 입힐 수도 있는 위험한 물질이라 많은 반려인들이 반려견용 신발을 구매해서 신기는데요. 우리 집 삐삐는 신발을 몇 번 도전했는데 로봇처럼 고장 나 버려서 더는 신기지 않고 염화칼슘이 보이면 안아주거든요. 그래서 아예 눈이 오거나 눈이 많이 온 다음날은 산책은 포기해요. 염화칼슘이 정말 장난 아니게 많이 뿌려져 있으니까 그걸 피해 다니는 것도 힘들더라고요. 집 앞만 돌거나 또는 3층 공용테라스에 잠시 풀어 놉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눈이 싫어졌어요. 이게 강아지도 강아지인데 공무원들도 비상소집돼서 눈치워야 하고, 오피스텔 경비아저씨도 너무 힘들게 눈을 쓸어내야 하니까 마음이 무겁더라고요. 그리고 눈이 녹아 길이 지저분해지는 일명 슬러시길을 아주 싫어합니다. 예전에는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 참 예뻤는데, 이제는 공기도 좋지 않으니 눈이 회색으로 보일 때도 있어요.
그랬는데, 반전이 있었어요. 삐삐랑 주말에 가는 파주애견운동장이 있어요. 오프리쉬로 산책을 할 수 있게 잘 조성된 곳이라 삐삐 운동도 시킬 겸 자주 가요. 지난주에는 눈이 좀 쌓여 있었는데 삐삐가 신나게 달리면서 노는 거예요. 그곳에 있는 강아지들 중 가장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10개월 아가처럼 놀더라니까요? 평상시에는 그렇게 안 놀고 안 걷겠다고 딴청 피우는 애인데 막 뛰어노니까 지나가던 반려인들이 다 구경을 하는 거죠. 저는 이런 광경이 신기해서 삐삐를 구경하는 반려인들을 구경했어요. 하하
살다 보니 우리 삐삐가 애견운동장에서 가장 잘 노는 아이가 되는 모습을 보네요. 맨날 구석에서 제일 돈 아깝게 놀지도 못하던 아이가 눈을 만나 누구보다 신나게 놀았으니 이런 반전이.
싫어했던 눈이 조금 좋아지면서 이것이 낭만이구나, 언니가 잃어버린 낭만을 우리 삐삐가 일깨워주네 싶더라고요. 또 얼마 전 3층 테라스에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삐삐가 밟으면서 뛰어놀 때 천국이 이런 느낌일까 했어요. 그래서 쓴 시고요. 작년에 11월 첫눈이자 벼락같은 눈이 내렸을 때 지은 시를 보여드리면서 이번 주 글 마무리합니다.
DJ DOC의 노래를 듣는 겨울이 있었지
그때는 겨울방학만 기다렸던 것 같아
한 살 더 먹으면 더 세련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고
캔디향이 나던 그때
다이어리를 주는 잡지 하나가 큰 기쁨
겨울에는 얼린 서주 우유 대신 뭘 먹었더라
어묵 국물이었던가
내일 눈 온대 하면 설렘이 먼저였던
합창대회 때 부른 오 해피데이 같았던
그땐 그랬지
노래는 듣고 있지 않아
딱히 기다리는 것도 없고
한 살 더 먹으면 더 늙은 내가 있겠지
할부로 산 향수를 뿌리고
다이어리는 여전히 좋아하긴 하지만
이가 시려 얼린 건 못 먹고
어묵 국물은 먹으러 가기 귀찮다
내일 눈 온대?
왜 11월에 눈이 오냐고
양심 없는 거 아니냐고
그런 나라도
낙엽이랑 똑같은 색을 하고선
낙엽이랑 똑같은 색의 응아를 하는
작은 털 뭉치와 함께여서 해피는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