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 수저 내려놓습니다

밖에서 다시 물게요

by 희삐
귤모자를 쓴 인형과 눈알을 부라리는 인형


귤 수저


나는 귤을 물고 태어났어요

제일 먼저 한 말은

"이놈"이었고요


세상을 쥐락펴락할 줄

알았던 아이가

귤 알만 쥐락펴락하다

마흔이 되었네요


맛 좋은 귤은 하영이서

강아지랑 나눠 먹었죠

그런데 강아지 간 수치가

튀어버린 거예요


이놈 간 수치

간 수치 이놈

귤을 내던졌더니

간 수치가 내려가더군요


강아지 간 수치가 쥐락펴락하는 나는

더 이상 귤을 물지 못해요

그리고 강아지의 안녕을 물어요



아빠는 제주도에서 태어났어요. 할아버지는 귤농사로 할머니는 해녀 일로 5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아빠는 육지에서 엄마를 만나 제주도에서 신혼생활을 하시고 저를 낳았습니다. 제가 세 살 무렵 서울에서 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귤을 사 먹어 본 적이 없어요. 늘 제주도에서 보내주신 귤을 먹었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제주도 남부에 있는 서귀포시 중문동 근처예요. 중문이 지형상 귤이 특히 더 맛있다고 해요. (지형에 대해서는 기억이 안 납니다. ^^;;) 나름 귤부심이 있는 곳에서 자란 귤만 먹어서 그런지 저는 귤맛에 매우 까다롭습니다. 서울에서 누군가가 준 귤이 맛있다고 느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자취를 하고 나서는 부모님도 제주도로 이사를 가셔서 이제는 겨울마다 부모님이 저에게 귤을 보내주십니다. 그런데 초반에는 혼자 먹기에 너무 많은 귤이 오니까 관리하기도, 씻어 먹기도 벅찼어요. 결국 귤이 말라비틀어져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보내지 말라고 얘기도 했었죠.

그런데, 이제는 안 그래요. 귤 귀한 줄 알게 된 거죠. 많이 오면 일단 냉장고에 저장해 놓고 회사에 가서 나눠 먹거나 이웃과 나눈 후 믹서기에 갈아서도 먹고 그래요.

삐삐는 제주도에서 살기도 했고, 저랑 같이 귤도 나눠 먹은 적 있어서 귤만 꺼내면 쪼르르 달려와 자리를 잡아요. 알맹이 한 알 작은 거 줘도 세상 진귀한 것을 먹는 듯이 다소곳하게 눈을 감으며 받아먹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요.

그런데, 작년 12월에 동물병원에서 피검사를 하는데 간 수치(ALT)가 확 오른 거예요. 이전보다 더 먹은 거라고는 귤 밖에 없어서 귤을 끊었더니 올해 1월 말에 본 피검사에는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간수치와 귤과의 상관관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삐삐는 그렇게 귤과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웬만하면 집에서 귤을 먹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최근에 삼촌이 레드향을 보내 주셨는데 회사에 가져가서 동료들과 먹었습니다.

삐삐가 건강할 수만 있다면 집에서 귤 못 먹는 것쯤이야, 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간 수치 제자리에 있어라, 까불지 말고!)

작년에 아버지가 2020년에 새로 심으신 나무에서 처음으로 난 귤을 보내주신 적 있었는데, 그 귤이 참 예뻐서 지은 시가 있어 공유합니다. 그럼 다음 주에 또 봬요!




귤은 사랑을 싣고


새 귤나무에서 난 귤이

말간 얼굴로 우리 집에 왔어요


호기심으로 꼭지를 들이미는 귤도

도시가 낯선지 뒤로 숨는 귤도 있어요


아빠가 하나씩 톡톡 따서 담을 때

짓던 표정이 보여요


색도 곱고 동글락 귀여운 귤이

우리 딸 어렸을 때 같다며


장갑으로 쓱쓱 문질러

상자에 담았을까요


유독 예쁜 귤 하나 고르니

우리 강아지 10년 전 얼굴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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