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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Aug 23. 2019

우리가 반짝이는 순간

사람과 사람이 서로 달래며 견딘

 아침에 눈 뜨자마자, 속이 답답하고 울렁거렸다. 소화제를 찾아 두 알을 급하게 넘겼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건 체한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거란 걸 알아챘다.

 요즘 두터운 사이였던 지인과 어긋나기도 하고, 새벽까지 부부싸움을 하다 잠들었다. 공연히 서글프고

옆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싶었다.



 이럴 때, 마음속에 간직하기보다 그대로 꺼내는 편이었다. 밖으로 내뱉다 보면 어느새 속이 후련해졌다. 흥분해서 떠들다  '심각하게 열 받을 일이 아니네?' 이런 숙연한 생각이 드는 거였다. 차차 기분이 나아져 발랄하게 대화를 끝내는 날도 있었다.

 나에게 화가 나거나, 우울한 일이 오래 머물 수 없는 이유였다. 오자마자 재빠르게 다 털어내 버리니 말이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연락처 목록으로 들어갔다. 엄지손가락으로 빠르게 화면을 터치하자, 나만의 애칭으로 저장한 이름들이 지나쳐간다. 목록을 내렸다가, 올리기를 반복하다 멈추었다. 이렇게 망설이다 꺼진 핸드폰만 바라보는 날이 부쩍 늘었다.





 금요일, 날치(별명, 예쁜 이름이 있지만)에게서 전화가 왔다.

"쑥한테 내 마음의 병을 옮길 것 같아, 전화를 못 하겠어."

"전화를 타고, 귀에서 귀로 옮겨지는 거야? 마음의 병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없으면 그거 로봇이지."

"아무 감정도 안 느끼고 싶어. 로봇처럼."

어떤 감정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친구에게, 생일 선물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만나, 못 전해 준 네 생일 선물이 묵어가고 있어."

그러자 그녀는 그걸 또 받아쳤다.

"김장 김치냐, 묵어가게."



 그녀는 힘들면 혼자 삭혀 문드러질 때까지 끙끙거리며 아파한다. 처음에는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은 건가, 우리가 깊은 사이는 아니었나 싶어 섭섭하기도 했다. 도통 마음을 꺼내지 않으니 말이다.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나에게 걱정의 짐을 한 부분 뚝 떼어주는 느낌이란다. 이럴 땐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시시콜콜 나의 감정들을 뱉어 냈던가.

 우리의 관계가 영글어지면서, 나만의 방법이 생겼다. 지켜보고, 기다리다 보면 "쑥"하고 말문을 띄게 되어 있다. 그녀는 오래 숙성된 고민을 펼쳐 놓으면서도, 연신 미안해한다.

 혼자서 감당했을 시간이 짠해서 온 힘을 다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 진다. 눈을 맞추고, 등을 두들겨주며 말이다.



 이틀 뒤, 그녀가 우리 동네로 훌쩍 날아왔다. 몇 시쯤 도착하면 되는지 묻길래, 눈만 뜨면 바로 오라 했다.

9시에 도착해서, 내가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동네 카페로 데려갔다. 달달한 캐러멜 마키아토 두 잔을 시켰다. 창가 쪽 둥근 테이블에 앉은 우리.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사이로 싱그러운 큰 잎을 늘어트린 화분이 보였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작은 카페에 덩그러니 우리 둘 뿐이었다.

 그녀에게 선물을 건넸다. 네모난 큐빅 아래로 앙증맞게 달린 진주 귀걸이. 화려하거나 큰 액세서리를 하지  않는 그녀를 생각하며 고른 것이었다. 하고 온 귀걸이와 바꾸어 끼며, 쌍꺼풀이 짙은 큰 눈이 연신 웃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드디어 터진 말.

"쑥. 말할 때가 없고, 울 장소도 없고, 화낼 곳이 없어서 너무 가슴이 답답했어."

난 의자를 돌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여기서 말할 때가 없다는 뜻은, 알지? 쑥도 애 보느라, 남편 챙기느라, 글 쓰느라 바쁜데 나까지 무거운 짐을 얹으면 안 되지."

 사방이 막힌 곳에 떨렁 혼자 있는 기분이었을 거다. 감정을 쏟아내고 싶은데 자꾸 안 되는 이유가 붙는 그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며칠 전의 나조차도,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누군가를 찾다가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으니까.



 눈을 맞추며 나란히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친구를 바라보는 내 눈도 뜨거워졌다.

"난 왜 이렇게 쑥만 보면 눈물 바람이지?"

"날치야, 나도 그래. 우리 똑같아."

그렇게 아무도 없었던 카페 안에서 둘이 훌쩍였다. 코까지 푼 다음, 먹먹한 목소리로 "점심 뭐 먹을까?" 했다가 웃음이 팍 터졌다. 꼬막 비빔밥을 먹고, 바로 또다시 커피를 2차로 마신 후 헤어지고 오는 길.

생일 카드를 읽었다며, 자기도 사소한 일상이나마 매일 쑥이랑 같이 하는 게 소원이라는 문자가 왔다.

그녀의 생일 카드에, 이렇게 적었다.

'날치야, 내 꿈은 널 우리 동네 남자와 결혼시켜서 가까이에서 만나고 싶을 때마다 바로 불러서 보는 거야. 태어나줘서 고마워 친구야'




그녀가 무거운 마음을 품고 왔다면, 돌아가는 길엔 조금이라도 홀가분하기를 바란다. 꼼짝도 하기 싫을 일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왔다는 건, 그것도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를 운전해서 왔다면, 분명 참다 참다못해 터지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내 편'인 누군가의 따뜻한 눈빛과 같이 먹는 밥만으로도, 연달아 마신 커피에 배가 불러 졸음이 몰려오는 것만으로도, 추웠던 마음이 노곤 노곤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귀에 달린 작은 진주의 반짝임같이 우리도 빛날 수 있을까.

상대의 다독임과 애정 어린 목소리로도, 조금씩 내 안이 투명하게 채워지는 것처럼. 찬란하게는 아니더라도, 그윽하고 고요하게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달래며 견딘, 일요일 오후가 더디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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