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투르 톰슨>한미 사진미술관_2018년 8월에
<Nature as a Playground 한국-북유럽 사진 교류전>
페투르 톰슨의 작업은 자연경관이 훼손되는 풍경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훼손되는 자연에 대한 경고를 나타내는 듯했지만, 미묘하게 그 광경은 조형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화면의 구도는 이를 세심하게 담고 있으며 파괴되는 자연은 불쾌하지도 않고, 절망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게도 하지 않는다. 그 무덤덤한 시선으로 인해서 인간의 자연파괴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린 태어나는 순간 공업용품들을 사용해가며 환경을 파괴해 간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이루어지는 인간의 과정이다. 동물은 사체가 되어 흙의 양분을 만들어가지만, 인간은 죽음조차도 고귀하게 여긴 나머지 마지막까지 온갖 것들을 매장한다. 환경이 파괴되고 온난화는 가속화되지만, 그것을 막을 방법보다는 온난화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방법들이 더 빨리 선행되는 사회 시스템 속에 살고 있다. 과도한 인본주의는 상황을 이상하게 몰아가지만, 그것이 우리가 학습해온 방식이다. 환경파괴는 인간 숙명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고도화된 사회가 될수록 그것은 더 심각해지는 실정이지만, 아무도 자연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에서 획득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런 냉소적인 시각을 부린다고 한 들, 나도 그 숙명을 비켜갈 수 없다. 그렇다고 파괴되는 자연을 찬양하면서 산업사회를 지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야생의 삶으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없다. 이런 불합리한 시스템 속에서 작가는 그저 이 경관의 변화를 담아내는 행위만에 목적을 두었다.
“2003년부터 아이슬란드 국립 전력공사가 진행한 댐 건설현장의 사진을 담고 있다. 3개의 댐 중 가장 거대한 댐 중에 하나인 이곳은 동부 해안의 미국 회사가 짓고 있는 회사의 알루미늄 용광로에 사용할 전기를 위한 것이고, 그로 인해 유럽의 가장 큰 야생 구역을 파괴했다. 아이슬란드 사상 가장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동시에 가장 논란이 많은 사건이 되었고 이로 인해 아이슬란드 경제위기까지 초래했다.”(작품설명에서)
작가는 이 작업을 진행하기 전 알루미늄 용광로에서 일을 했었고, 그가 생계를 위해 했던 일이 이러한 상황들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 진행된 이 작업을 통해서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변해가는 환경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이 최선이었고,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이라는 것은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다.
이러한 비관적인 생각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을 보면서 느낀 조형미는 인간인 나에게 아름다운 것인지, 혹은 인간(작가)이 사진에 담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지 모호해진다. 자연파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더 극단적으로 보이도록 구도를 잡지만 작가 페투르 톰슨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만들어낸 구도는 어쩌면 우리의 운명을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거대한 스케일의 자연을 파괴해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경이롭게 보인다. 그것은 실로 감탄사를 자아낸다. 그 스케일이 더 확장될 때마다 마치 우리는 거대한 자연을 다룰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작가의 사진은 이런 생각들을 연상시키게 하다가도 단절시킨다. 그 행위는 실로 보잘것없이 초라해 보인다. 정말로 초라한 그 행위는 또다시 모든 것을 삼켜 버릴 것 같은 불길함을 주기도 하고, 영원히 진행될 수밖에 없는 인간과 자연의 숙명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인간의 자연파괴라는 것은 약육강식의 섭리처럼 그저 자연의 일부일 수밖에 없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작가의 그런 무심한 시선 때문에 결국엔 모든 것은 어떤 정의를 내리기 힘들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 또한 정의 내리기 힘들어진다.
자연이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삶이 불가능해질 때, 이 작품들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런 생각 때문에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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