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 초기 (2): 그에게 보내는 편지 쓰기

초기 (이별 직후 ~ 3개월)

by 이제리프

실연의 시간을 거치며 시간의 상대성을 몸소 깨달았다. 실제로 사귀었던 5년 동안 보다 이별 후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은 정말로 하염없이 길었다!


특히 이별 초기 3개월 동안이 제일 그랬다 - 지나간 세월들을 끊임없이 곱씹거나,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내거나, 스스로나 혹은 상대방을 탓하며.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하지 못한 말과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리고 그것이 폭발하려 할 때마다 그에게 몇 번이고 전화해서 울고 이 아픈 마음을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이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할 지어도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나만큼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고, 나는 더욱 더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정과 생각이 끊임없이 바뀌고 매일 새로운 버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매번 전화해서 어떤 업데이트가 있었는지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와 나는 이미 헤어진 사이니까.


그래서 대신, 편지를 썼다. 노트든 컴퓨터에든. 나는 개인적으로 컴퓨터에 작성하는 것이 더 좋았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바뀌는 감정과 생각을 항상 새로이 손글씨로 적어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최대한 솔직히 적어냈다. 욕을 적고 싶다면 욕을 실컷 써내려도 좋다. 그와 사귀었던 과정에서 내가 느꼈던 모든 것 – 좋았던 것, 서운했던 것 포함—을 적어냈다. 나는 주로 그의 헤어짐의 이유가 너무 모호하고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이유와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상황을 방치했는가에 대한 원망을 실컷 적어 놓았다. 일단 편지를 쓸 때는 정말 누구의 잘못이었느냐를 떠나 그냥 내 감정과 생각에 충실한 게 좋다.


이후, 감정이 바뀌고 과거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면 편지를 수정했다. 오늘 따라 내가 잘못한 내용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슬쩍 며칠 전에 써놨던 욕을 지우고 미안함을 표현하는 문단을 추가. 나의 경우 과거의 버전들을 저장해놨기 때문에 언제라도 되살리고 싶은 문단이 있으면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컴퓨터에 쓰는게 좋다). 시간이 흘러 읽어보니 며칠 간격으로 같은 사건임에도 다른 해석을 붙이고 다양 무쌍하게 변하는 편지의 톤앤 매너를 관전하는 재미(?)가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각기 다른 편지를 쓴 것처럼. 그안에는 화난 나, 절망한 나, 슬퍼하는 나, 그리움에 젖은 나, 한이 맺힌 나들이 여기저기 날뛰고 있었다.




때로는 편지를 쓰다가도 정말로 그에게 연락해서 나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은 날이 있었다. 몇 번이고 핸드폰을 들고 카톡을 열고 통화 가능하냐고 메시지를 쓰다 말다 했던 그 지독하게도 아팠던 순간들. 그런 날에는 무조건 다시 편지로 돌아왔다 - 편지를 다시 읽어내리고, 수정하고, 그리고는 나는 아직 생각이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이 편지가 더 이상 수정되지 않는 날이 왔을 때, 바로 그 때—이 편지를 보내거나 혹은 대화를 요청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키포인트는 이것이다: 다양하게 날뛰는 생각이 하나로 수렴될 때까지 계속 생각을 편지에다가 정리하며 일단은 기다리겠다. 정말로, 정말로, 생각이 하나로 정리가 되는 날이 오면 그때 정말 한번 통화를 요청해서 내 입장을 깔끔하게 전달하자!


재미있는 것은, 몇 주가 지나 정말로 더 이상 편지를 수정하게 되지 않았을 때 그 편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헤어지고 나서 2주 동안 미친듯이 편지를 썼고 (정말 많이 고칠 때는 하루에 7번쯤 고친 때도 있었다), 한달이 지났던 시점에 편지에 대해서 잊어버렸고, 한달 반 정도가 지난 시점에 그 편지들을 읽어보니 내가 참 작은 디테일까지 아주 세심하게 생각했었고, 정말 많은 것들을 과장해서 생각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편지를 보냈다면 아마도 꽤나 민망했을 것이다. 그래서, 다행히도, 결국 그 편지는 보내지지 않은 채 내 컴퓨터 어딘가에 고이 보관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보내고 싶으면, 보내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미 엄청나게 인내했는데 보내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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