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최강 끝장 서울살이 생존일지

by intojeong

나는 어릴 때 이런 기도를 했다.

'어른이 되면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싶다'

바쁘고 일이 많아야 멋진 커리어 우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혼구녕을 내주고 싶다.


어쨌든 꿈은★이루어졌다.

난 서울에서 일을 시작했고, 남들은 여유롭게 연말연초를 보낼 때 사무실 붙박이가 되어 회계감사를 준비했다. 내 키보다 높게 쌓인 서류와 영수증을 정리하며, 내 입에서는 한숨과 하품이 번갈아 나왔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종이독까지 올라 양손의 피부가 뒤집어졌는데 핸드크림을 아무리 처발라도 계속 허물이 벗겨졌다. 급기야 감당이 안 되는 지경이 되어 수술용 장갑을 끼고 일해야 했다. 나는 마치 수술방 외과 의사가 뼛조각을 맞추듯이 실종된 증빙서류를 찾아 맞추었다.


주말 출근이 석 달째 이어지자 다각도 원인분석이 이루어졌고, 나는 말이 씨가 되었다는 결론이 내렸다.

"소원을 빌 땐 신중하고 구체적이어야 해."


이렇듯 직접 겪어야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오늘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까불었던 것들의 말로를 기록해본다.



1. 나는 배멀미가 심하다


나는 고3 때 해양대로 수시 원서를 넣었고 1차에 합격했다. 나의 단순한 뇌 알고리즘은 <제복을 입으면 멋있겠다>는 입력값에, <해양대 진학>이라는 결과값을 도출했다.


나는 바다를 항해하며 세계 곳곳을 다니는 상상을 하며 2차 관문이던 수능 시험을 준비했다. 그 아찔한 항로 설정은 수능 점수 미달로 막을 내렸고, 몇 년이 지나 해피엔딩(?) 임을 알게 되었다.


제주도에 놀러 가서 처음 타본 잠수함 곳곳에는 손만 뻗으면 닿는 위치에 '검은 비닐봉다리'가 있었다. 왜 필요한지 타보면 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 누군가 항해학과를 가겠다고 하면 '배부터 타봐라'고 꼭 얘기해주자.



2. 나는 콩팥이 작다


연신 사이즈를 갱신하며 완벽한 D라인의 몸이 완성될 무렵이었다. 더 방치하면 이태원의 빅사이즈몰로 향하게 될 터였다. 운동이 시급했고 스쿼시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 2회씩 가는 스쿼시는 마침 석 달 등록 시 반값 이벤트를 하고 있었고, 기분 좋게 석 달로 등록했다.


나의 스쿼시 도전은 정확히 3회 방문으로 마무리되었다. 실패 요인을 분석했는데 쉴 새 없이 튀어 다니는 공을 받아쳐야 하는 스트레스와 실내 공간의 답답함으로 나왔다. 그럴싸했다. '그래 거긴 지하에 있어서 답답했어. 난 탁 트인 곳을 좋아해'


그렇게 야외에 위치한 테니스장으로 갔다. 큰 맘먹고 1:1 개인 레슨을 시작했다. 강습 첫날, 강사님은 내게 자세가 좋다며 배운 적이 있냐고 물으셨다. 처음이라고 하니 말도 안 된다며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했다. 두 번째 레슨에서는 구민 체육대회에 나갈 생각이 있는지 물으셨고, 그다음 레슨에서는 백핸드 자세를 너무 좋다며 지금까지 이렇게 빠른 진도는 없었다고 하셨다. 이러다 곧 테니스 여제 사라포바와 겨룰 거 같았던 테니스 레슨은 4회를 끝으로 최후를 맞았다. 다음날 출근을 못했기 때문이다.


"콩팥이 남들보다 작으세요. 상체를 많이 쓰는 운동은 피하세요." 의사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난 그렇게 테니스 유망주 자리를 내려놨다.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오래 춤출 수 있는 몸인지 미리 체크하자.



3. 나는 콩국수를 좋아한다.


어느 여름날 콩국수를 먹고 그 자리에 드러눕게 된 불상사가 생겼다. 구토와 복통으로 3일을 시달리고 나서야 체증이 사라졌는데 그 후로 콩국수는 쳐다도 안 보게 됐다.


그리고 몇 년 뒤, 회사에서 1박 2일 도보순례를 떠났다.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4시간을 걷고서야 늦은 점심을 주는 혹독한 일정이었다. 한여름 땡볕에서 평지만 걸어도 죽겠는데 고개를 넘고 산을 넘어야 했다.


도보순례 무리에서 점점 멀어지며 부상자용 봉고차에 태워달라고 애원하고 싶어질 때 겨우 식당에 도착했다.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테이블마다 김치와 풋고추가 놓여 있었다. 풋고추를 집어삼키며 메뉴판을 보는데 주방의 커튼이 쫙 열리며 은색 그릇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다.


그 은색 그릇 안에는 하얀 국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맙소사. 믿고 싶지 않았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필 미칠 정도의 허기진 상태에서 콩국수가 나오다니..

먹고 죽을 것인가, 안 먹고 죽을 것인가 고민도 잠시 나는 콩국수를 입에 넣고 있었다.

세상에나! 그 날의 콩국수는 육해공 산해진미와도 못 바꿀 천상의 맛이었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핵꿀맛이었다.


* 세상에 나쁜 '콩국수'는 없다. 나쁜 몸뚱아리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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