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어렵고, 보람된 일
국제행사, 즉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쓰이거나 아니면 한국에서든 외국에서든 영어로 행사가 진행되는 행사라고 보면 된다. 나는, 한국어와 영어를 다 구사하는 한/영 MC이기도 하고 비즈니스 순차 통역 등을 따로 진행하기도 하는 *통역사(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전문 통역사는 아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아래에)이기도 하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국제개발학을 석사로 하고, 글로벌 기업, 국제기구 등에서 쌓은 글로벌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방송, 행사 진행+외국어(영어) 구사를 접목시킨 내 일은 완벽한 통역사와, 전문 방송인 출신 연예인 MC의 중간쯤 와있단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둘 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뛰어들 긴 했지만 행사를 진행할 때도, 외국인 연사들의 발표와 흐름을 통, 번역해서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실은 이 둘의 경계를 구분 짓기가 애매하다.
앞선 글("연두부 멘털이어도 괜찮아")에서도 얘기했지만 프리랜서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멘털이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클레임이 나오지 않게끔 '완벽해지자'로 노선을 정했기에, 맡은 일을 내 생각만큼 잘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행사, 통역이 끝난 그날 밤은 낮에 했던 말들을 복기하면서 무조건 이불 킥 예약이다. 그래도 국제행사 MC를 할 때는 시간 내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MC 역할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고, 통역을 할 때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만 집중할 수 있다. 둘 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둘을 동시에 "완벽하게" 잘 해내야 하는, 게다가 순차 통역을 해야 하는 연사가 9명, 동시다발적으로 마이크를 잡는 재앙스러운 상황이 나에게 벌어졌다.
바로 작년 2018 부산 국제광고제 기자간담회 (Media conference) MC/통역이었다.
2018년 부산 국제광고제 기자발표회, 행사 시작 전!
2. 부산엔 국제영화제(PIFF)만 있는 게 아니래요.
부산 국제광고제 AD Stars!
보통 국제광고 제하면 칸느 라이온즈라 불리는 (맞습니다! 그 유명한 칸느 영화제가 끝나면 같은 곳에서 열리는 광고제) 칸 광고제가 제일 유명하고 그 외에도 태국 같은 아시아지역에 국제 광고제가 꽤 열린다. AD stars라 불리는 부산 국제광고제는 올해 12해째를 맞는 2019년에도 매해 2 만점이 넘는 광고작품이 출품되어 경쟁을 치르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광고제이기도 하다.
부산 국제 광고제 공식 CI AD STARS2018년, 작년에 내가 맡은 기자회견은 AD STARS 광고제 첫날 국내외 기자, 언론인들을 초대해서 그랑프리(대상)를 제일 먼저 공개하는 자리이다. 그래서 기자회견 1부는 광고제 주최 측에서 인사말, 소개 행사 같은 순서 (MC 진행)를 하고 2부는 각 심사 분야, 경쟁 분야의 심사위원 9명가량을 무대에 초대해서 심사기준, 특이점, 감상과 의견 등을 기자들이 현장에서 물어보는 형식 즉, 외국인 심사위원들의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하고 한국인 기자들의 질문을 영어로 통역하는 자리(순차통역 진행)였다.
형식은 순차통역인데, 비즈니스 미팅이나 콘퍼런스 같은 경우 발표자료나 어젠다가 미리 주어지는 경우도 많고 통역사들은 그 주제에 맞게 사전에 준비를 해서 통역 자리에 배석한다. 그런데 기자 회견이라는 게 원래 각본이 없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묻고 답하는 형식이라 그런 류의 시나리오나 각본이 있으리 만무했다. 장소가 '부산 국제 광고제'라는 것, 매년 새롭게 정해지는 주제에 따라 작년엔 '초연결 시대의 소통'이란 화두만 주어졌을 뿐.
나 같은 경우는 앞부분의 mc 역할을 하는 동안은 대본으로 진행하고 이후 기자 간담회는 현장의 상황에 따라, 그리고 공식 회견이 끝난 후 심 시위원장 특별 단독 인터뷰를 순차 통역하는 것 까지가 내 역할이었다.
말 그대로 사회자도 하고 통역도 해야 하는데 그 강도가 역대급이었던 것이, 광고업계 자체도 잘 알던 분야가 아닌 데다 통역을 해야 하는 심사위원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각 경쟁분야의 '장'격으로 9명 정도를 한 자리에 앉혀서 그분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하는 말을 통역해야 했다.
게다가 심사위원들은 브라질, 캐나다, 태국, 말레이시아 미국, 스웨덴 등등 출신과 문화가 너무나 다른 곳(표준 영어가 아닌, 모국어를 기반으로 한 영어 발음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에서 모여든, 그러나 매체를 다루는 전문가들 답게 '말'에 있어서는 한 명도 소극적인 분이 없다고 했다. 재작년 간담회(2017) 경우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이 아니어도 즉흥적으로 추가 설명을 한다는 식으로 대답해서 갑자기 자기들끼리 토론의 장을 만드는 '발표'와 '토론'이 너무 익숙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고, 재작년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통역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고 행사 대행 관계자분이 귀띔을 해주셨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안 그래도 낯선 분야인 광고업계에다 각본이라고는 없는 기자회견 통역이란 부담감에 행사 의뢰가 들어온 1달 반 전부터 부산 국제 광고 제 만 생각하면 가슴에 납덩이가 얹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혀 새로운 업계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인사들을 만날 수 있고 내 커리어에도 좋은 레퍼런스가 될 거란 욕심이 생겨서 더 잘해내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바야흐로 한 달 전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광고 전반에 대한 마케팅 이론부터 시작해서 국내 대표 광고 에이전시에서 오래 일했던 선배에게 '예상 질문지'를 들이밀고, 동향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의 명단이 뜨자마자 구글에서 이분들이 했던 모든 인터뷰 기사, 동영상 (특히, 모국어의 억양대로 영어를 구사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에 평소 말하는 스타일과 자주 쓰는 표현들을 모으기 위해)을 다 긁어모아서 광고 업계의 표현을 입에 익히고 외우는 고시 공부 수준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기자라면 부산 국제 광고제에 어떤 질문을 하게 될까, 분위기는 어떨까 등등의 질문지부터 관련된 기사나 인터뷰가 더 나오지 않을까 강박적으로 구글에 검색어를 저장해 놓는 식이었다. 부산 국제광고제 출장 전날까지 밤에 자려고 누우면 기대와 부담감으로 납덩이가 된 심장을 애써 달래며 자는 날이 계속됐다. 동시통역은 내 분야가 아니지만 거의 동시통역하는 맘으로 노트 테이킹, 뇌 속의 언어 전환, 등을 전 날까지 연습을 하고 드디어 당일 새벽 8시,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KTX에 올라탔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