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롤러코스터 일주일

by 바람

나는 세계일주를 꿈꾸며 55세에 명예퇴직을 하였다. 31년간 몸담았던 교단을 떠나 새로운 모험에 나선 것이다. 나의 첫 번째 도전은 어학연수였다. 2023년 6월 26일부터 11월 24일까지 5개월간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어학연수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파란만장하고 힘들었으나 즐겁고 감동적이었던, 그 모든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은 그때의 일기 중에서 중요한 사건들, 중요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일기가 너무 길고 어떤 내용은 지루할 수 있어서 과감하게 편집하였다. 나는 독자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도 꿈을 꿀 수 있고, 도전할 수 있고, 설렐 수 있다면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그러면 나와 함께 우당탕퉁탕 꿈의 여정을 떠나보자.


2023.06.26. 월요일 [공포를 느끼다]

드디어 첫 등교다. 아침 일찍 일어나 떨리는 마음을 안고 학원으로 향했다. 건물 입구에는 나와 같은 신입생들이 가득했다.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있었는데 동양인이 절반을 조금 넘는 듯했다. 오리엔테이션을 받기 위해 3층 학생 라운지로 올라갔다. 밝고 명랑한 목소리를 가진 금발의 교장이 학교 안내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입을 연 순간, 나는 멘털이 붕괴되었다. 이럴 수가! 영어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20년간 혼자서 해외 배낭여행을 다녔기 때문에 생존영어 정도는 자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쏟아지는 영어의 폭포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심지어 내 이름을 부르는데도 그 말이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큰일 났다. 어쩌냐? 어떡하지?

학원 홈페이지를 통해 기초적인 정보와 규칙을 미리 읽어온 덕분에 화면에 소개된 내용은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러나 말로 하는 설명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하겠다. 단 한 마디도!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이 멍한 표정이다. 그나마 그게 위안이랄까?

1교시는 문법 수업인데 이 오리엔테이션으로 대신하는 것 같다. 그리고 2교시부터 각자 교실로 찾아가란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2교시 듣기 수업 교실을 찾아갔다. 교사가 들어와서 내 이름을 부르는데 또 못 알아들었다. new student라는 말을 겨우 알아듣고 손을 들었다. 교사가 뭐라 뭐라 하는데 말이 너무 빠르다. 미치겠다. 옆 자리에 앉은 학생이 교재 70쪽을 펼치길래 얼른 따라 펼쳤다. 그러고 보니 교사가 not seventeen, seventy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그게 들리지 않았다. 너무 긴장해서 아는 단어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문제는 그거다. 이제는 아는 단어를 말해도 그게 들리지 않는다.

3교시 읽기와 쓰기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물어볼 한국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한 무리의 동양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런데 다들 무언가 하느라 바빠서 말을 붙이지 못하겠다. 평소 같으면 철면피로 물어보고 말도 붙여볼 텐데 마음이 쭈굴쭈굴해져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신이 무너지다 못해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렇게 오전 수업이 끝났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울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나? 다른 학생들이 가는 방향으로 휩쓸려 학생 라운지로 돌아왔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먹고 있다. 그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는데 익숙한 한국말이 들렸다. 한국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자석이 끌어당긴 듯 달려가서 합석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분들은 자녀들을 캐나다 학교에 보내고 여기서 어학연수를 받고 있단다. 어린 학생들만 있었다면 내가 끼어들기 어색했을 것 같은데 다행이다. 내가 오늘이 첫날이고 멘붕 상태라고 하니까 다들 자신들도 처음엔 그랬다고 위로해 주신다. 그중에는 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분도 계신다. 또다시 다행이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받은 위로는 오후 수업을 듣고 또다시 무너졌다. 그나마 쉬운 회화 수업이었지만 교사가 입을 연 순간, 나의 뇌는 자동으로 정지했다.

그렇게 첫날이 지나갔다. 정말 하루 종일 내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큰일 났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였다. 정말 앞으로 어떻게 여기서 살아가야 할지 공포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2023.06.27. 화요일 [잠 못 드는 밤]

밤새 잠을 설쳤다. 잠이 들만하면 화들짝 놀라서 깼다. 몸은 지치고 신경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잠이 드는 둥 마는 듯한 상태로 아침이 되었다. '아, 오늘도 어제처럼 힘들면 어쩌지? 왜 이렇게까지 안 들릴까? 입은 왜 얼어붙는 걸까?' 걱정을 한 아름 안고 학원으로 향했다.

1교시 문법 수업 교실로 찾아갔다. 어제 이 시간에 오리엔테이션을 했기 때문에 오늘이 첫 시간이 된다. 너무 일찍 가서 아무도 없길래 중간쯤 앉았다. 하나 둘 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인사를 나누는데 대부분 서로 아는 눈치다. 이번에도 신입생은 나뿐인 것인가? 어제 본 그 많던 신입생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나는 또다시 주눅이 들어 있는데, 누군가 한국분이냐고 묻는다. 한국말로. 얼마나 반가운지 눈물이 날뻔했다. 나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은 '유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는 누구나 처음에는 힘든 시기를 거치지만 곧 나아진다며 위로해 주었다. 아마도 내 얼굴 표정에서 거의 울듯한 것을 눈치챈 듯하다. 일단 '유리' 덕분에 안심이 되었다. 못 알아들었을 때 물어볼 사람이 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러나 교사의 말은 나의 귀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나마 이번에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은 용케 알아들었다. 어제보다는 나아진 것인가? 월말이라 어제 시험을 본 모양이다. 학생들에게 점수를 확인해 주고 모르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이 학원은 매월말에 각 영역별로 시험을 봐서 레벨을 올리거나 남긴다고 들었다. 나도 다음 달에는 월말 시험을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시험지 확인 후 교재에서 어느 단원에 대해 뭐라 뭐라 한참 설명을 한다. 대부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용케 homework라는 단어는 알아들었다. 연습문제 3과 4를 숙제로 해오라는 것 같다. 그리고 새로 진도를 나갈 단원에 대해서도 안내한 것 같은데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수업이 끝난 후 '유리'는 앞으로 물어볼 것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카톡을 연결해 주었다. 친절한 '유리'의 응원에 힘입어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다음 교실로 향했다.

어젯밤에 지친 몸을 이끌고 혼신을 다해 2교시 듣기 수업의 숙제를 했다. 덕분에 옆자리 학생과 서로 답을 확인하는 활동 정도는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정답을 확신했던 문제가 틀렸단다. 맥락에 따라 달리 사용되는 숙어를 몰라서 틀린 것이다. 어제 수업 중에 교사가 뭐라 뭐라 설명한 것이 바로 그 맥락에 대한 설명이었나 보다. 역시 교사의 말이 들려야 한다. 그래야 한다. 겨우 냈던 용기가 또다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문득 나의 레벨이 이 교실에 맞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여기 오기 전에 한국에서 온라인으로 레벨테스트를 받았다. 문제 푸는 것은 물론이고 줌으로 연결해서 말하기 듣기 테스트까지 받았다. 그 결과, 지금의 교실에 배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저들이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은 아닐까? 레벨을 낮춰달라고 할까?

쪼그라든 마음으로 3교시 읽기와 쓰기 교실로 향했다. 이 교실은 오늘 레벨 테스트를 한단다. 아휴, 월말에 들어온 내가 잘못이지. 일단 하는 데까지 해보자. 그나마 듣기와 말하기보다는 읽기와 쓰기는 조금 나은 편이니까. 필기도구만 남기고 책상 위를 깨끗하게 치우니까 문제지와 답안지를 나눠준다. 나의 전략은 모르는 것에 시간낭비하지 말고 아는 것만 확실하게 풀자는 것이다. 결국 절반 이상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풀 수 있는 문제가 몇 개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점심시간에는 어제의 그 한국분들에게서 각 교사들의 특징과 수업에 대한 정보를 얻어들었다. 이런 정보는 매우 유익하다. 그런데 이분들은 대부분 자녀들의 방학에 맞추어 휴가를 내서 다음 주부터 2~3주 나오지 않는단다. 흐흑. 마음속으로 울면서 다음 교실로 향했다.

오후의 회화수업에서 나의 정신은 또다시 바닥을 쳤다. 교사가 활동지를 나눠주면서 뭔가를 설명했는데 뭐 하라는 것인지 몰라서 엉뚱하게 풀었다. 빈칸이 있어서 그것을 메꾸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옆의 응답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바보. 그 옆에 responses라고 쓰여 있고 그것은 아는 단어인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눈도 보이지 않는 것인가? 나는 바보가 된 것인가? 나의 정신은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파고 내려가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숙제를 마치고도, 잠들기 위해 누워서도 나의 신경세포는 온통 외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계속 안 들리면 어떻게 하지?'


2023.06.28. 수요일 [주눅 들지 말자]

또다시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이틀이나 불면의 밤을 보냈더니 정신이 혼미하다. 공부를 시작하지 어느덧 3일째가 되었다. 혹은 아직 3일밖에 안되었다. 숙제는 겨우 했지만 모르고 넘어간 수업내용들이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복습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미치겠다.

오늘도 일찌감치 문법 교실에 가서 숙제를 다시 검토했다. 학생들이 하나 둘 들어오고 이젠 좀 익숙해진 학생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유리'가 들어오길래 나는 아무래도 레벨을 낮추는 것이 어떨지 고민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시간을 가져보란다. 자신도 처음에는 그런 심정이었지만 이 시기만 지나가고 나면 나아진다고 했다. 게다가 지금은 월말이라 아마도 내가 적응하기 더 힘든 상황일 것이란다. 하지만 다음 주가 되면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유리'의 진심 어린 충고에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문법 교사가 들어오는데 어제와 다른 사람이다. 어제 교사가 뭐라 뭐라 한참 얘기한 것이 자기가 내일부터 다음 주까지 휴가기간이라는 얘기였단다. 그랬구나 생각해 보니까 vacation, holiday 어쩌고 한 것 같다. 아, 언제쯤 귀가 트여서 이런 얘기를 바로 알아들을 수 있을까? 방금 보강 들어온 교사가 자기소개를 한 것 같은데 이름이 뭔지도 못 알아듣겠다. 그나마 숙제해왔냐, 파트너와 확인하라는 얘기는 눈치로 대략 알아들었다.

어제 열심히 숙제한 덕분에 파트너와 서로 답을 확인할 때는 그럭저럭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숙제를 다 확인한 후 다음 페이지를 펼치란다. 그 순간, 나는 또다시 멘붕에 빠졌다. 여기도 숙제였단다. 뭐라고? 난 못 들었는데? 아니, 못 알아들었는데? 심지어 어젯밤에 '유리'가 카톡으로 숙제 알고 있냐고 물었는데 나는 알고 있다고 당당하게 대답했었다. 아, 그때 어느 페이지인지 확인할걸!

한번 당황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지둥 댔다. 급하게 본문을 살펴보는데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의 특성에 대한 글인데 너무 당황하니까 갑자기 happy의 뜻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문제의 답을 파트너와 확인하라는데 나는 뭐 확인할 것도 없다. 급히 파트너의 답을 보고 따라 쓰기 바빴다. 어떻게 해서든지 문제의 의미를 파악하려는데 교사의 영어 설명이 쏟아져 들어와 집중할 수가 없다.

한숨만 내쉬고 있는데 교사가 연습문제를 하나씩 학생들에게 묻는다. 내 순서가 되자 슬쩍 파트너의 답을 얘기했는데 교사가 처음에는 맞다고 했다가 잠시 고민하더니 틀렸다고 한다. 그리고 뭐라 뭐라 설명하는데 갑자기 귀에 확 들리는 부분이 있다. 10 percent! 나에게 주어진 질문에는 always가 있었으나 본문에는 10 percent가 그렇지 않다고 했으므로 이 문장은 틀린 것이다. 문득 이런 문제라면 내가 침착하기만 하면 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영어가 들리지 않아 허둥지둥 대지만, 침착하게 읽고 차분하게 파악하면 나도 풀 수 있는 수준의 문제들이다. 갑자기 내가 너무 주눅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눅 들지 말자. 그래. 좀 더 자신감을 갖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자.

듣기 수업에서는 조금 더 힘을 내려고 노력했다.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반복해서 학습한 단어들이 있어서 그런지 교사의 말에서 단어들이 몇 개 들리기 시작했다. 문장 단위로는 들을 수가 없고 단어를 겨우 알아듣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조금 들린다. 그래. 단어라도 잡아내자. 새로운 페이지의 듣기 활동에서 나는 또다시 절망했지만 오늘은 숙제가 없다는 교사의 말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학생들이 모두 함께 환호했다. 그래. 어디나 학생들 마음은 똑같다.

읽기와 쓰기 수업에서 교사는 또다시 책상 위를 깨끗하게 치우란다. 그리고 이번에는 쓰기 테스트라면서 빈 종이를 나누어 준다. 내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 교사는 보강교사인데 숙제만 잔뜩 내고 시험만 자꾸 보면서 시간을 때워서 학생들이 매우 싫어한단다. 세 가지 주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쓰란다. 대충 만만한 주제를 선택했지만 막상 쓰려니까 아는 단어가 매우 한정적이라 쓸 말이 많지 않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아는 단어 중에서도 스펠링을 제대로 아는 단어는 더더욱 적다는 것이다. 그나마 문단 구조는 잡을 줄 알아서 그럭저럭 빈 종이를 채워나갔다.

학생 라운지에서 한국분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생활용품 파는 곳과 한국음식 파는 곳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유용한 정보를 한국말로 들으니까 너무 좋다. 여기 오기 전에, 영어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한국사람들끼리 모여서 한국말을 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 힘든 정신상태라서 이렇게라도 한국말을 듣지 않으면 미칠 것 같다. 지금 나의 멘털은 이분들과 '유리'가 지켜주고 있다.

오후의 회화 수업 시간은 지금까지 배운 단어들로 퀴즈를 풀고 빈칸 메꾸기를 했다. 단어들이 대체로 익숙한 것들이었고 모르는 단어라도 교사가 몸동작으로 힌트를 많이 주어서 이해하기 쉬웠다. 심지어 빈칸 메꾸기 문제는 다 맞혔다.

이렇게 정규수업이 모두 끝난 후, 나는 extra 수업 교실로 향했다. 벽에 붙은 홍보물들을 꼼꼼히 살피던 중 이 학원에서는 몇 개의 extra 수업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숙제와 예습, 복습 등 혼자 하는 공부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자꾸 영어에 노출되고 교사들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에는 2개의 문법 extra 수업이 있는데 그중에서 초급반 교실로 찾아갔다. 교사는 '마리아나'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새로 온 학생들의 이름과 문법 레벨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과거 시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는 교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판서와 함께 다시 설명하니까 이해가 되었다. '마리아나'는 가급적 천천히 발음하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덕분에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보충수업까지 듣고 숙소로 와서 숙제도 하고 예습도 했다. 예습을 하면 조금이라도 교사의 말이 들리지 않을까 싶어서 절박한 마음으로 예습을 했다. 오늘은 잠을 자야 한다. 어쩌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잠들 수 있지 않을까? 온몸의 세포가 피곤하다고 외치고 있다.


2023.06.29 목요일 [어제 보다 나은 하루]

이틀 동안 못 자서 그런지 어제는 거의 기절 상태로 잠을 잤다. 덕분에 개운한 상태로 씩씩하게 학원으로 향했다. 오늘도 문법 수업은 보강 교사가 들어왔다. 숙제를 옆자리 파트너와 함께 맞추어 보았다. 그런데 일부의 답이 서로 달랐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학생들의 답이 서로 달랐다. 교사가 쭈욱 답을 불러주는데 어떤 학생이 교사가 불러준 답 외에도 가능하지 않은지 질문을 한다. 교사는 판서를 하면서 다시 분석해 보더니 다른 답도 가능하다고 한다. 역시, 선배들은 다르다. 뭔가 질문도 하고 다른 표현도 찾는다. 난 언제쯤 저런 경지에 이를까?

듣기 수업을 위해 어제 나는 몇 페이지를 미리 예습해 왔다. 그런데 내가 예습한 페이지는 모두 건너뛰고 엉뚱한 페이지를 펼치란다. 왜 하필이면 애써 예습한 부분을 건너뛰는 거야? 게다가 새로운 페이지에는 모르는 단어와 애매하게 알고 있는 단어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농담의 의미를 가진 단어들이 있었다. 교사가 설명하면서 웃고 학생들도 웃는데 나만 웃지를 못했다. 그게 뭔지 모르니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다시금 어깨가 축 처져서 읽기와 쓰기 교실로 향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유리'가 나에게 파이팅이라고 외쳐주었다. 그래. 조금 더 힘내 보자.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이나 시험을 본 보강교사가 이번에는 무엇을 할지 궁금했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빈 종이를 나눠주더니 주제를 주고 쓰기 연습을 하고 있으란다. 그리고 학생들을 한 명씩 불러서 어제의 쓰기에 대해 개인별로 feedback을 해 준다. 학생들 자습시키는 것은 싫지만 학생들에게 개별적으로 feedback을 해 주는 것은 좋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내 점수는 75점이라면서 좋은 점수라고 한다. 내 생각에도 좋은 점수다. 사용된 단어의 수가 몇 개 되지도 않는데 말이다. "문단의 구조는 맞게 썼다." 그렇겠지. "그런데 문장이 좀 더 길어야 하고 좀 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알지. 그런데 단어를 알아야 설명하지. "스펠링은 많이 틀렸다." 그게 내 문제야. 교사는 빨간 펜으로 틀린 단어들을 고쳐주었다. 문법은 그런대로 했나 보다. 문법 레벨을 묻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결과다. 그래. 내가 잘하는 부분도 있네.

오늘 점심은 한국분들과 외식을 했다. 이제 이분들과는 작별이다. 내일 점심부터 이분들은 휴가를 가고 한 달 후에 돌아온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으면 다시 만나자고 했다.

오후의 회화 수업은 단어 설명하기 게임을 했다. 교사는 학생들의 국적이 겹치지 않도록 신중하게 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단어카드를 엎어 놓고 한 명씩 자신의 카드에 적힌 단어를 영어로 설명하라고 했다. 단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렵다. 다들 한정된 단어로 설명하려고 하니까 점점 몸으로 말하기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자꾸 설명하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다들 즐겁게 웃고 떠들면서 게임을 하고 나니까 재미도 있고 학생들끼리 더욱 친해지는 효과도 있다.

오늘도 extra 수업이 있어서 참여했다. 목요일 extra 수업은 회화와 상식이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나'가 수업을 한다.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반가워했다. 오늘은 캐나다의 유명한 것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어카드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사진이나 그림이 있어서 이해하기 쉬웠다. 그리고 설명해 준 단어의 스펠링을 쓰도록 시켰다. 어차피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자주 보고 듣게 될 단어들이라 유익한 수업이었다.

이렇게 extra 수업까지 알차게 듣고 숙소로 향하면서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오늘은 '어쩌지?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교사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눈치로 파악을 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첫날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은 아니다. 최소한 공포스럽지는 않다. 정말 나는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어제보다는 나은 하루였다. 그건 확실하다.


2023.06.30. 금요일 [실망해도 절망하지 않기]

오늘은 금요일이다. 매월 마지막 금요일은 오전 수업만 있단다. 게다가 다음 주 월요일은 공휴일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학원으로 향했다.

문법 시간에 숙제였던 부분을 자신 있게 파트너와 확인하고 교사의 설명을 들었다. 물론 교사의 설명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예상했던 일부의 내용은 대충 알아들은 것 같다. 미리 예습해 온 부분도 효과가 있어서 최소한 교사가 어느 부분을 설명하는지는 따라갈 수 있었다. 다만, 교재에 나오지 않은, 뭔가를 길게 설명했는데 그건 도무지 모르겠다. 그리고 연습문제를 풀었는데 꽤 많이 틀렸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구나. 실망했지만 절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듣기 시간에는 보강 교사가 들어왔다. 어제 듣기 수업 교사가 자신은 휴가 간다고 했다는데 나는 또 못 들었다. 아니 못 알아들었다. 보강 교사는 팝송 가사가 적힌 종이를 나눠주었다. 빈칸이 잔뜩 있는데 노래를 들으면서 빈칸 메꾸기를 하란다. 어디선가 들었던 노래인데 이렇게 빈칸 메꾸기를 하려니까 잘 들리지 않는다. 여러 번 듣고 나서 교사가 답을 확인해 주고 노래를 다시 들려주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빈칸을 메꾸고 나서 다시 들으니까 아까 들리지 않던 단어들이 대부분 들린다. 정말 신기하다.

읽기와 쓰기 수업은 무얼 하게 될지 궁금했다. 교재에 실린 짧은 이야기를 함께 읽었다. 이야기는 결말 부분이 미완성이었다. 단어가 그다지 어렵지 않아서 그럭저럭 내용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나는 읽기에 강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빈 종이를 나눠주고 뒤에 일어날 일을 상상해서 10~20 문장으로 써보란다. 단어만 좀 알면 내가 아주 재밌는 결말을 써 줄 수 있는데 안타깝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가 교사는 몇 명의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켰다. 보아하니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학생들을 골라서 시킨 듯하다. 나름 재밌게 결말을 만든 학생들이 있어서 박수를 쳐 주었다.

이렇게 정신없던 5일의 수업이 끝났다. 처음 3일은 징징거렸고 나머지 2일도 허둥지둥거렸지만 조금은 안정된 것 같다. 안정되었나? 피곤, 후회, 절망 사이사이로 용기, 희망, 오기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했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다. 아직도 교사의 말은 10~20%만, 그것도 단어 위주로 들린다. 학생들과의 대화도 단어로 알아듣는다. 나의 speaking도 단어 나열 수준이다. 나는 이 어학연수를 왜 스스로 신청해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일까? 과연 어학연수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정말 영어가 들릴 수 있을까? 지금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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