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로 떠난 여자 8편.
그 날,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한 대학병원 임상실험 센터에 앉아 있었다.
면접과 스크리닝을 거쳐 코로나 백신을 개발하는 임상실험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한 달에 한 번 내원해서 500CC가량의 피를 채혈하는 게 실험의 핵심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아는 사람을 만날까 두리번거렸다. 만나면 뭐라고 변명을 할까 궁리하기도 했다. 다행히 의사도 간호사도 병원 손님 중에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준비된 그럴듯한 변명도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친구가 너처럼 애국심 강한 아줌마가 있어 이 나라가 성장한다고 치하 해줬을 때도 용돈벌이로 하는 거야 라고 있는 그대로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내가 이번에 작정을 하고 말야, 호수 마을로 가서 소설을 하나 써보려하는데 말야. 그렇더라도 내 용돈은 내가 벌어야겟다 싶어서...라고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동료의 말처럼 한군데 가만히 못 있고 뭔가 다른 일,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해 계속 굴러다녔다.
데일리 방송을 할 때도 다큐멘터리를 하자고 기획서를 디밀었고, 국내,외로 출장을 다녔다. 퇴근을 해서도 혼자 남아 글을 썼다. 지금 쓰는 글이 언젠가 어디서 무언가가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남들은 이사가 피곤하다는데 나는 한 집에 오래 사는 게 무료했다. 이십년 결혼생활 동안 한 열 번은 이사를 다닌 것 같다. 밥벌이로는 제법 만족했던 방송국도 그만두었다. 나만의 글을 쓰겠다고 대책 없이 혼자가 되었다. 프리랜서 작가였으니 퇴직금 같은 것도 없었다. 내 피를 파는 것으로 용돈벌이 해가며 알아주는 이 없는 글을 쓰는 초보 작가 신세가 되었다. 대세를 따르지 않고 늘 다르게, 외따로 살아왔다.
채혈이 임상실험의 전부였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포기했을지 모른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주사바늘이었다. 채혈은 그냥 주사처럼 바늘을 꽂고 3-5초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채혈을 하러 한 달에 한 번 병원을 방문하면 혈압을 잰 다음 한 장의 서류에 사인을 한다. 오늘치 내 피 값을 받을 서류에 사인하는 것이다. 일곱 개의 징공 튜브와 작은 채혈접수증을 들고 채혈실로 이동한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채혈을 하려는 사람들이 번호표를 들고 앉아 있다.
순서가 돼서 간호사 앞에 앉으면 노랑 생고무줄을 팔꿈치 위쪽에 묶는다.
"주먹을 꽉 쥐세요..."
하고는 주사바늘을 팔꿈치 안 쪽 혈관에 찌른다.
그리고 붉고 걸죽한 내 피를 첫 번째 튜브에 뽑아낸다. 튜브 하나에 삼분의 일쯤 차는데 10초가량 걸린다. 그걸 일곱 번 반복한다. 진공관을 교체를 여섯 번을 하는 것이다. 그건 정말이지 채혈이 아니라 매혈이 된다. 가는 바늘이 내 신체의 핵심인 피를 강탈당하는 느낌이다. 분명히 내가 사인을 했는데도 끌려와서 강제로 당하는 기분이다. 그 피의 값은 삼십만원 정도다.
“내가 말야,
바늘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인데 말야. 피를 팔아야한다고 피를! 게다가 나 빈혈 심하거든? 그것도 일곱 개나 되는 진공관에 말야. 아 물론 진공관에 반만 채우는 거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일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내 안쪽 팔꿈치, 왜 접히는 부분 안쪽 있지, 거기 피부가 얇잖아, 거기를 정통으로 간호사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소나 돼지한테 바늘 꽂듯이 푹 꽂는다니까. 물론 처음엔 따끔하기만 하지, 그 다음부터는 뭉근한 통증이 오고 그 통증이 기분까지 우울하게 한다니까...그럼 그 때 난 뭘 하느냐고? 벽에 걸린 온갖 포스터의 광고 문구를 읽지. 뭐 그런 거 있잖아. 심장질환을 예방하는 아홉 가지 방법, 허리운동을 한다. 육류보다는 채소를 섭취한다....다 읽으면 처음부터 또 읽고...어떨 땐 양을 세기도 해. 울타리를 넘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이렇게 말야.”
“다 끝나고 병원을 나올 땐 어떠냐고?
일단 병원에 갈 땐 끌려가는 소처럼 걸어가지만 나올 땐 지옥을 탈출하듯이 뛰어나오지. 현기증이 나면서 아무나 붙잡고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뛴다니까. 저절로 그렇게 돼. 서러움에 뛰는 건데, 분명히 돈 받고 하는 일인데도 무섭고 서러운 건 똑같다니까. 세상에, 바늘 하나가 사람을 완전히 정복한다니까. 그래, 아프고 무섭고 서럽고 그래서 주는 돈이라고 알면서도 울먹한다니까. 그럼 갑자기 애처럼 엄마 생각이 난다니까. 우리 울 때 저절로 엄마-아 라고 하잖아. 팔순 넘은 우리 엄마가 글 쓴다고 피를 판다는 사실을 알면 기겁을 하실 일 아냐? 딸이, 귀한 딸이 피를 팔다니 말야. 아니 아니 혼낼지도 몰라. 나이 오십이 되도록 그만한 돈도 마련하지 못하고 사느냐, 여자가 살림을 어떻게 사느냐, 혼낼 거 같아.”
“우리 엄마가 어떤 사람이냐면,
몇 년 전에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았는데 정말로 막내딸이 붙잡혀서 우는 소리까지 들려주면서 삼천만원 빚을 져서 잡아왔으니 돈을 내란 거였는데 우리 엄마가 다 듣고 나서 대뜸 전화 건 애들을 혼냈대. 아니, 지가 살림 잘 못 살아서 빚을 졌으면 지가 대가를 치러야지 왜 돈을 대신 갚으라고 전화질이냐고, 내 딸한테 직접 받으라고. 오히려 고래고래 꾸중했대.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런 줄 알았지만 그렇게 한 거라고. 우리 엄만 그런 사람이야. 응석 받아주고 빚 대신 갚아주고 그런 사람 아니란 말야. 안 되겠다, 엄마한텐 비밀로 해야겠지. 사실 호수마을에 혼자 사는 것도 아직 모르시거든. 어려서부터 간호사나 공무원이나 교사가 돼서 안정적으로 먹고 살라고 당부, 또 당부 했는데 말 안 들었거든. 그래서 작가가 돼서 뭘 하려고. 그것도 나이 오십에? 글쎄, 그걸 나도 모르겠어...”
병원을 나와 호수로 가는 기차역에서 한 줄의 김밥을 먹고 우유도 마셨다.
위화의 중국소설 허삼관매혈기에서 허삼관은 아내와 가족을 위해 피를 팔았다. 허삼관 매혈기에 피를 뽑고 나서는 다시 피가 돌도록 돼지고기 내장을 먹어야 한다고 돼 있지만 그건 내게 사치다. 나의 매혈은 아직 다섯 번이나 더 남았다. 호수에 있는 동안 나의 유일한 돈벌이니 도망가거나 취소하지 않겠다. 모두가 말렸지만 결혼해서 고생을 자처했듯이, 아무도 권하지 않았지만 오십 다 돼 글 쓰겠다고 스스로 피를 팔았으니 누군가를 붙잡고 질척대며 울먹일 수도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굴러가는 돌이니까.
서울의 매혈기는 잊고 다시 호수 앞에 섰다.
언젠가 박경리 문학관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내가 생각한 건 나는 이렇게는 못 쓴다. 이런 작가는 못 된다였다. 박완서 작가의 책들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내가 살아온 일상과도 겹치지만 내가 경험했으면서도 이렇게 세공하듯이 깐깐하진 못하니 문학적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호랑이를 그릴 배짱도, 남이 먼저 알아봐 준 타고난 재능도 없는 오십의 여자는 무슨 근거로 글을 쓰는 걸까. 내가 쓰려는 글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는가. 이건 작가로서 나를 믿는가 문제였다. 지금은 가보자 라는 심정으로 매일 쓰고 있다. 피를 팔아서라도 써야 할 글이 뭐 대단한 거냐 그건 또 아니다. 호수마을에 180일을 기거하며 내 인생에 첫 소설을 완성하겠다는 게 다였다.
글을 쓸 때, 나는 아이들을 잊고 남편을 잊고 생활을 놓고 울고 웃을 수 있었다.
온전한 ‘나’로 반응하고 감동했다. 사람들과 생활을 벗어나 나만의 글쓰기라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나만의 긍지였다. 이혼의 위기를 붙잡아 준 것도, 어린 아이 셋과 거친 남편으로부터 일탈하려는 방황을 붙잡아 준 것도 글쓰기였다. 문학을 전공하지도 등단을 한 것도 아니었다. 희곡을 전공하고 방송작가로 일한 경험이 있었고, 나는 쓴다 라는 단순한 행동만이 전부였다. 운 좋게 좋은 출판사에서 에세이 집 한 권 낸 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
크고 작은 공모전에 낙방에 연연할 수 없는 건 당선이 돼도 다음 글은 써야하고 안 되도 다음 글은 써야했으니 계속 쓴 게 여기에 이르렀다. 글을 쓴다는 것에 빚을 진 셈이다. 매혈까지 해 가며 쓰게 되었으니 글 쓰는 나의 작은 역사에 사연이 더해졌다. 나만의 방에서 나만의 문장을 만나는 날까지 집착하고 매달리겠다. 내일은 늦고, 지금 아니면 결코 없는. 글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나는 계속 글의 뒤를 따라다녀야겠다. 이것은 중년에 짝사랑이겠다. 그 사랑은 혼자라서 더 은밀해지고 호수곁에서 더 깊어진다.
<오늘의 필사>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씀으로써 사색을 깊이 해나간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고통스러웠고 정신적으로 물속에 푹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측면도 때때로 있다. 그러나 ‘고통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이런 스포츠에 있어서는 전제조건과 같은 것이다. 만약 심신의 단련에 필요한 고통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일부러 트라이애슬론이나 풀 마라톤이라고 하는,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스포츠에 도전할 것인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 고통을 통과해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에서 자신이 살고 있다는 확실한 실감을, 적어도 그 한쪽 끝을, 우리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의 성질은 성적이나 숫자나 순위라고 하는 고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그 자체 속에 유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다는 인식에 다다를 수도 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은 변함없이 항상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만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교훈을 배워나가는 것에 있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