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수로 떠난 여자 9편.
책을 읽고 있었다.
무척 조용한데...정말 조용하잖아? 라고 책을 덮었다. 이번엔 글을 썼다. 노트북 자판 타이핑 소리가 고요함을 깨고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좀 안심이 되었다. 나 혼자가 아니야. 이렇게 노트북 자판 소리가 나와 함께 있는 거야. 혼자가 되어 고요함 속에 살아보기를 원했지만 정작 고요는 낯설어서 자꾸 뭔가를 하곤 했다. 개가 짖지도 않는 밤. 어둠과 나와, 고요와 호수만 사는 어떤 행성 같기도 했다. 가만히 책상에 앉아 싱크대 모서리를 기어가다 멈춘 거미를 노려본 적도 있다. 녀석도 나의 시선을 감지했는지 가만히 멈춰 나를 노려보았다. 눈이 어디 있는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의식했다. 그 순간에 나와 거미는 그렇게 만났다.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 속에서. 거미는 이 방에서 나보다 더 오래 살았을 테니 가능하면 잘 모시려 한다. 내가 이 방을 떠나도 계속 살아가시길 바란다.
어떤 밤엔 이런 충동을 느꼈다.
돌 하나를 집어 들고 호수로 달려간다. 이야아!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그 돌을 호수에 던진다. 호수는 돌의 공격으로 파장이 일고 그 물소리가 호수의 정적을 깨고 어디선가 잠들었던 새들이 푸드득 날고 물 속 물고기도 이게 뭔 일인가하고 서로 이리저리 헤엄을 치는 난동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 말이다. 호수에 돌 하나가 일으킬 연쇄 파장을 상상했다. 허나 감히 호수에게 그런 장난을 칠 베짱이 없었다. 잠 든 호수를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깨울 수는 없다. 호수에 온 이상 나도 여기에 질서에 동화되어 볼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토록 고요한 밤에도 소리가 있을지 모른다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곤 했다. 더, 더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 순간에 고요함의 소릴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무향실에 가 본 적이 있다.
anechoic chamber. 글자 그대로 소음이, 소리가 하나도 없는 특수 공간이다. 은행 금고를 들어갈 때나 있을법한 두꺼운 쇠문을 삼중으로 열고 계속 들어가니 공간이 펼쳐졌다. 소리의 반사를 막기 위해 제작된, 아득히 높다란 천고, 그 벽들까지 온통 흡음재로 이루어져 있고 밑바닥 역시 흡음재에 그 위로 공간을 두어 발 딛는 표면은 철망으로 만들어져 있다. 무향실에 발을 디디면 바닥은 철망 아래 텅 빈 공간이 아득하게 어둡다. 들어서자마자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귀가 머엉해진다. 무음의 상태가 시작되는 것이다. 진공처럼, 무음의 상태다. 흡음재는 촘촘한 솜뭉치로 전방위로 소리를 흡수할 수 있도록 위 아래, 옆으로 커팅돼 있다. 덕분에 독특한 구조의 면들이 입체적이고 정교하다. 극도의 정교한 기술은 결국 예술 작품이 되었다. 무향실 한 가운데 서서 가만히 둘러봤다. 소리 없음, 절대 고요는 무한하게 빛났다. 공간 역시 무한한 행성이고 그 한가운데 혼자 선 지구인처럼 느껴졌다. 아득한 고요, 소리의 사라짐과 함께 육체도 사라지는 것 같은 기묘한 텅빔의 세계였다. 그것에 압도되어 고백처럼 내뱉었다.
무향실이 아름답단 사람은 처음이라며 안내해 준 연구원이 웃었다.
무향실에서 1분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괴로워한다고 한다. 한 가지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일반사람과 시각장애인에게 눈가림을 하고 공간에서 박수를 쳐서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를 맞추라고 했는데, 시각장애인은 정확하게 소리가 나는 위치를 맞춘다고 한다.
“무향실에 현재까지 최고 오래 버틴 사람은 45분가량인데, 환청이나 구토, 어지럼증이나 환상을 보이기도 하죠.”
절대 고요는 사람에게는 무리한 상태인가보다.
혼자 자다가 새벽 정적에 잠이 깰 때도 있다.
하지만 정작 그건 정적이라 할 수는 없다. 일정 주파수의 소음이 계속 깔려 있기 때문이다. 미세하게라도 소리의 파장은 늘 우리 일상에 깔려 있다. 심지어 독서실도 일정 주파수의 노이즈가 깔린 상태다. 우리가 편안하게 느끼는 호텔의 고요조차도 일정 주파수의 노이즈가 흐르고 있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라도 듣는다. 무향을 경험할 일이 거의 없다. 어떤 음악가는 무향실, 무음실을 경험해야 진정한 음악가라는 말도 했다.
시골 고향집에는 여든세 살의 늙은 엄마가 혼자 산다.
언젠가 마음먹고 며칠 그냥 같이 밥 먹고 같이 자고 같이 텃밭을 손질하자고 내려간 적이 있었다. 일상적인 나날을 엄마와 보내자고 간 거였다. 첫날밤에 엄마와 부엌이 딸린 안방에서 잠을 자는데 어디선가 뽀지직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잠이 깨서 한옥 문살로 들어오는 달빛에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자그마한 쥐 한 마리였다. 바퀴벌레였어도 기겁을 할 형편인데 쥐라니! 잠이고 뭐고 놀란 김에 형광등을 켜고 엄마를 깨웠다. 엄마도 놀라 무슨 일이냐고 눈을 떴다. 기운이 없어 바로 일어나진 못하고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쥐가, 쥐가 방금 나타났다! 내가 일어나자 도망갔다! 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흥분을 했더니...
“난 또..., 불이나 꺼라.”
였다. 놀란 가슴이 아직도 뛰고 있어서 잠들 수가 없다고 했더니 그럼 중간 방에 가서 자라고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시골집에 혼자 사는 엄마도 길고 긴 밤의 고요가 매일 반복되다 보면, 그런 적요한 날들을 견디다 보면 쥐도 정겹고 반가울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이해했다. 찾는 이도 없고 혼자 잠드는 긴긴 겨울밤에 쥐 한 마리 나타나 어떤 소리를 내주면, 설령 녀석이 밀가루 좀 먹고 고구마 좀 갉아먹더라도, 작은 생명체가 나타나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큼이나 흥밋거리라고. 내가 거미와 교감을 하듯이. 엄마는 좀 더 거대하고 역동적인 쥐와 우정을 나누는 거라고. 외로운 사람들은 고요한 밤에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이해가 되었다.
다음날 아침, 호수에 보슬비가 내렸다.
습기가 호수 전체를 뒤덮어 몽환적이 된다. 그동안 두 눈으로 본 것들을 마음으로 보라고, 마음의 눈을 찾으라고. 제 3의 눈도 찾아보라는 속삭임 같다. 혹은 풍경을 가슴에 담으라는 듯이 가만히 침묵한다. 세상을 보기보다는 살아가고 느끼라는 걸 호수의 흐릿한 고요함으로 깨닫게 하려는 듯이 말이다. 젖어들어 상상하고 꿈을 꾸라는 듯이. 보이고 들리고 아는 것의 선을 넘어가 보라고. 그게 진짜 살아가는 거라고. 산등성이와 호수의 형제만 가늠될 뿐 실체는 한 발 물러서 있다. 고요함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많은 소리를 안고 있었다. 어쩌면 고요함의 발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까. 호수에서 나의 감각은 뒤틀어지고 확장된다. 좀 이상해져도 괜찮아. 너는 혼자고, 호수는 모든 걸 그저 바라볼뿐이야. 너를 부끄러워 하지 마. 주저하지도 마. 그래 앞으로 계속 가는 거야... 내 안에 내가 내 등을 조심스레 떠민다. 숨겨진 감각들이 슬그머니 살아난다. 나는 좀 달라진 것 같다. 좋은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