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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몰포스 Oct 17. 2023

겨울호수는 하얗게 봉인되었다.

-  호수로 떠난 여자 7편.


이 풍경을 봤으니, 호수에 온 일은 이미 다 되었다. 


생성도 없고, 사라짐도 없고,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환하게 빛나는 것이 정신의 세계를 둘러싼다. 

서로를 완전히 잊으니, 고요하고 순수하고, 온전히 힘 있고 텅 빈 상태에 이른다. 

텅 빔(허공)은 하늘의 심장(천심)의 광채로 가득 채운다. 

바닷물은 빛나고, 그 표면에 달의 얼굴을 비춘다.

구름은 푸른 하늘로 사라진다.

산은 청명하게 빛난다. 

의식은 이를 바라보면서 소멸된다.

달의 둥근 테두리만 남아 머무는 구나.


칼 구스타프 융, 리하르트 빌헬름지음,/ 문학동네 

황금 꽃의 비밀/ 중에서. 214쪽.



수면이 얼어붙은 호수위로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쌓였다. 


호수는 눈송이들의 세례로 거대한 얼굴을 가리고 동면에라도 들겠단 듯이 땅인지 호수인지 경계선을 지우고 새하얗게 새하얗게 침묵 중이었다. 숭고해서 조심스러웠단 듯이 호수 가장자리로 고양이 발자국이 쪼로록 흔적을 남긴 채였다. 오늘 아침은 고양이님이 나보다 먼저 호수를 산책하고 지나갔구나... 그런 호수로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그저 아름다운 하나의 생명, 하나의 영혼이 거기 있었다. 나는 나인 듯 아닌 듯 서 있었다.  



하늘마저 고요하고 희뿜했다. 

육지와 호수의 경계,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 눈부신 세계에 나는 서 있었다. 산등성이에 까마귀나 까치들, 호수에 청둥오리 떼들, 소나무 꼭대기에서 기침을 알리던 고아한 두루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겨울 외투에 목도리, 손장갑에 부츠까지 중무장을 했건만 나체가 된 듯 홀연하다. 어디 몸 뿐이겠는가. 오십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가파르고 앙칼지고 어설픈 것들이 훌훌 지워진 기분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혼자 침묵 속에 있었지만 거대한 고백과 용서가 이루어진 찰나였다. 



호수를 봉인한 것 같았던 눈은 오후가 되자 녹아버렸다. 

아름다운 것들은 이토록 속절없이 사라진다. 아름다운 것은 찰나로구나. 나의 호수와의 몰아일체도 역시 찰나였다. 나는 다시 호수를 서성이는 한 여자로 돌아와 주변을 살폈다. 호수 수면도 제법 녹거나 얼음이 깨져 청둥오리들이 유유히 노닐었다. 하루에도 아침과 점심과 저녁과 밤과 새벽의 풍경이 다른 호수. 아름다운 것은 내가 설명하려면 할수록 미끄러지듯 본질에서 엇나갔다. 차라리 침묵을 하기까지도 시간이 필요했다. 아침의 호수는 침묵 속에, 나의 가슴에 조용히 봉인되었다. 진실되고 아름다운 어느 찰나에 만날 수 있으리라. 사진이나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영혼으로.  



도시로 돌아온 지금도 그 날의 눈 쌓인 아침 호수를 떠올린다. 

하얗고 고왔던 눈, 눈이 고스란히 방해받지 않고 내려앉았던 호수의 보드라운 표면들...이라고 적다가 지운다. 그 호수는 나의 말로, 글로 표현되어질리가 없다. 그저 그 날 아이처럼, 혹은 나조차 아닌 것처럼 홀연하고 신령스러웠던 마음은 더듬을 수 있다. 그건 내 마음안에 있으니까. 다시 호수에 간다면 어느 추운 겨울 밤새 눈이 내려 한없이 고요한 그런 아침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 호수는 어쩌면 기억할지 모른다. 그해 겨울과 봄을 내내 곁에 서성였던 한 여자라는 걸. 아니어도 좋다. 나는 호수를 기억하니까... 아끼며 자주  읽어 낡았지만 여전히 보고 또 보는 책 가운데, 소중히 간직하는 대목이 있다. 지금, 그 글귀를 나누고 싶다. 





<오늘의 필사>

“...어느 책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 하나.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은 것, 눈을 감고 그 장면을 상상하면 울컥할 만큼 좋았다. 누군가는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테지만, 나는 삶에 환상의 몫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려는 삶에서도 내밀한 상상을 간직하는 일은 필요하다. 상상은 도망이 아니라 믿음을 넓히는 일이다...”


한정원, 시와 산책, 추운 겨울의 시작을 믿어보자 중에서 18쪽.



이전 06화 정말로 등긁이를 사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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