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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몰포스 Oct 17. 2023

한 남자가 호수마을에 찾아왔다.

-  호수로 떠난 여자 5편.  


그가 도착하기로 한 시각이 다가오자 코트를 챙겨 입었다.


방을 나오기 전에 거울을 한 번 더 보고 립글로스도 발랐다. 

호수마을에 와서 거울을 보고 단장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건물 복도 끝 추운 목욕탕에서 샤워도 낮에 미리 해두었다. 골목으로 나와 도로가에 서 있었다. 겨울밤은 고요했다. 노인들만 살아 그런지 일찌감치 집집마다 불은 꺼졌고 몇 개 가로등만이 텅 빈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더러 지나다니던 고양이들도 추위에 일찌감치 잘 준비를 하나보다. 호수마을로 온 지 한달째, 누군가를 기다린 건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남자를.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방에서 기다리지!”


그 남자가 익숙한 차를 끌고 내 앞에 멈춰 섰다. 

나와 이십삼년을 산 남자, 내가 낳은 세 아이의 아비이자 살아온 세월만큼 애증이 켜켜이 쌓인 남자, 금요일에 서울에서 퇴근해 아내가 혼자 기거하는 호수마을에 도착했다. 아내를 만나겠단 마음으로 세 시간을 물만 마시며 달려온 길이었다. 낮에 동네 구멍가게에서 사 둔 맥주와 마른안주를 꺼냈다. 라면을 하나 끓일 일인용 전기 포트에 물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 거렸다. 시골이라 밤9시에 문을 연 식당은 없다. 식탁이랄 게 따로 없어 책상 위에 책과 노트를 밀고 마련한 빈자리에 이것저것 올려놓고 스탠드를 켜놓고 전기난로까지 켜고 내 방에 마주앉았다. 


삼수 끝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남편을 만나 연애에 빠졌다. 

남편은 같이 사는 친구가 고만 좀 오라고 하다가 가출할 칠 정도로 자주 드나들었다. 등록금을 빌려 준 언니들이 어렵게 고학해서 연애할거면 돈부터 갚으라고 협박을 했다. 언니들의 돈을 갚느라 일 년을 월급을 갖다 바치면서 연애를 이어갔다. 남편을 본 엄마는 차라리 노처녀로 평생 혼자 살라고 했다. 친구와 가족을 배신하고 이 남자를 사랑했다. 그리고 세 아이를 낳고 살았고 오십에 중년 부부가 되었다.  


처음 만나 건 교보문고 음반코너에서 어느 여름날이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타고난 굵은 웨이브 곱슬머리에 갸름한 얼굴형 안에 커다란 검은 눈과 곧은 코와 작은 입술이 날카로워보였지만 어딘가 따스함을 숨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미군 갈색 티셔츠에 리바이스 517 청바지, 이태원에서 수제작 해 신은 소가죽으로 만든 웨스턴 부츠를 신은 그의 몸매는 긴 다리 때문에 제법 영화 속에서 튀어 나온 배우 같았다.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그랬다. 마주앉아 고개를 그릇에 쳐박고 라면을 달게 먹는 중년의 이 남자는 그 시절 시커먼 머리숱이 남달리 부숭했다. 나는 그 수북한 머리를 만지기를 좋아했다. 한 번도 자신의 머리를 만지게 한 적이 없단 남자가 나에게만은 허락했을 때 그에게 이미 마음을 뺏겼다. 



그 남자가 어느 새, 어느새는 아니다. 

이십삼년은 아이 셋이 나고 자라기에 충분한 세월이고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변해가는 시간이고 부숭한 머리카락이 빠지고 흑단같은 머리도 새하얗게 만드는 세월이니까. 그렇더라도, 이십삼년전 스타일리쉬한 청년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중년에 남녀는 뜨거운 밤을 보냈다! 가 되면 훈훈한 마무리 겠으나 그냥 잤다.  싱글 침대는 좁고 불편했다. 청춘의 추억, 온 지구를 불태우는 것처럼 뜨거웠던 연애조차도 호수가 내 방 침대의 불편함을 초월하지 못했다. 중년 남녀는 "어이그으 추워." "으이그으 허리야..." 를 사랑 대신 주고 받았다.  


결국 침구를 다 내려 카페트 위에 이불을 펴고 잠을 청했다. 

회사에 출근해 일 하고 저녁 내내 서울에서 호수마을로 장시간 운전을 했던 남편이 곤히 잠이 든 밤, 나는 스탠드 불빛 아래 홀로 잠들지 못했다. 그동안 혼자 잠 못 드는 날에 아쉬웠던 36.5도씨의 익숙한 몸둥이를 더듬기만 했다. 어두운 밤 잠자리에 들 때, 곤한 몸을 누일 때, 옆에 체온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그것만으로도 그간의 헛헛함은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이십년을 넘게 살면서 정말이지, 내가 도대체 이 남자의 어떤 점에 반해 결혼했나 기억이 안 나서 괴로웠다. 서럽고 서글프기도 했다. 내 가슴은 생활에 속아 지난 날의 연애감정 따위 회상조차 못하는 식은 가슴이 되었구나. 모든 사람이 만류하는 이 남자를 극구 선택해 이 고생을 자처하는 이유가 뭔지, 그 때 저 남자를 보면 가슴이 왜 뛰었던가 생각이 안 났었다. 호수의 고요와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어우러져 그동안 기억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오랜 기억이 떠올랐다. 



그 때 내가 얼마나 황홀했던가를.


그래서 귀 막고 눈 막고 덜컥 구청으로 가서 혼인신고 하라고 내 도장을 순순히 내줬던가를...아아 그건 연애의 역사가 아니라 도끼로 내 발등 찍은 그야말로 흑역사의 점철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가슴 뭉클하도록 아름답게 여겨졌다. 그토록 무모하게 열렬할 수 있었던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는 발견은 대단한 생기였다. 애증의 날들조차 그 연애의 연장선일 거라는 거대한 이해가 된 그 밤에 조금은 남편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작은 키도 누우니 커보였고, 천정을 향해 눈 감은 갸름한 얼굴도 잘 생겨 보였다. 숱이 빠져 회색빛으로 물든 머리조차 세파를 뚫고 달려온 중년의 사자처럼 애잔해 보였다.  


호수마을로 내려올 때 짐을 싸느라 우연히 책장에서 발견한 시 한 편을 펼쳤다. 

이십삼년 전에 결혼식을 치르고 내게 건넨 그 시는 빛 바랜 종이로 내 일기장 속에 끼여 있다.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남편이 처음으로 내게 건넨 시 따위는 있는지도 몰랐다.  호수로 오려고 짐을 꾸리지 않았다면 재회할 수 없었던 연정의 시였다. 중년이란, 한 남자가 건넨 순정의 시조차도 망각하게 하는가. 호수마을에 찾아온 한 남자가 거친 성미와는 다르게 진심을 다해 쓴 시를, 그가 잠 든 호수마을 나의 방에서 마음으로 읽어본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호수마을에서 문득, 그러면 저어기 호수도 이 시를 듣게 되겠지. 어쩌면 잠 든 남편도 그러하겠지.   


<나의 아내에게


너는 나에게 있어서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형상이다.

나에게 숨결과 움직임을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느낄 수 있었으며,

너의 숨소리를 빼앗지 않고도,

네가 내게 숨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더라도

네가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히 나는 살아 있고

또 움직인다.

달리고, 사랑하고, 분노한다. 


내가 죽어버리더라도 

네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흐르고 흘러

꼭 지나야 하는 길을 거쳐서 

꼭 이르러야 하는 곳을 이미 앞질러서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영역에 존재한다. 


네 힘은 나를 슬프고 즐겁게 하며

행복한 만큼 분노하게 한다.

그 큼을 가늠할 필요 없으며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너는 나의 아내이며 나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심장과 핏줄과 

숨 속에 존재한다. 

모든 바람과 숨과 어둠 속에 

네가 있고, 나와 함께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여

내가 슬프거나, 노엽거나

네가 아프거나 숨이 찰 때에도 

세상은 너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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