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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몰포스 Oct 20. 2023

네 발 달린 친구가 있었다.

-  호수로 떠난 여자, 10편.  



보들이를 만난 건 호수에 오고 두 달 쯤 후였다. 


매일 산책하는 버스정류장 맞은편에 녀석이 먼저 꼬리 흔들며 시선을 던졌다.

 흙이 조금 묻은 보드랍고 따스한 눈덩이 같았다. 노인들이 사는 호수마을에서 보들이는 가장 어린 동물이었다. 어릴 때 정 든 딱 고만한 똥개 생각이 났다. 라면 박스에 실려 온 녀석은 갈색 털이 짧고 보드라운 시골개였다. 두 귀가 아래로 촉 늘어져 만져주면 짧은 다리로 날뛰었고 그 귀가 팔랑팔랑 거렸다. 정 둘 곳 없던 나는 녀석에게 마음을 기울였다. 어느 날 작은 녀석을 누군가 데려가 버렸다. 며칠 후, 옆집 큰 개에게 종아리를 물린 건 사고였지만 개는 나와는 친해질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런 일도 모두 잊은 후에는 애 셋 키우는 것도 버거웠고 어리고, 작고, 왔다갔다 하는 동물은 질색이었다. 밥을 청소를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는 것들은 영영 작별하고 싶었다.  



보들이는 민박집 앞에 이미터 가량 되는 빨간 전깃줄에 묶여 있었다. 


한겨울이라 녀석의 물그릇이 얼어있기도 했다. 

물을 먹고 싶어 그릇을 핥으면 그릇이 통째로 나동그라졌다. 녀석은 그 소리에 놀라 이리저리 뛰기도 했다. 처음 몇 번은 등만 어루만지면  꼬리를 살살 흔들며 가만히 나를 보던 녀석이, 얼마간 정 들었다 싶을 땐, 등을 쓰다듬으려는 내 손이 자꾸 헛짓을 하도록 정신없이 뛰었다. 내 외투 속으로, 두 다리 속으로 온 몸을 디밀고 달려들었다. 작고 귀여워서 이빨을 드러내는 것조차 사랑스러웠다. 어리고 작은 동물이 내뿜는 따스한 생명력에 중년의 영혼이 위로받기도 했다. 내가 탈 버스에 올라 떠나면 녀석은 뒷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내리더니 짧게 오줌을 급히 누고는 버스를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사랑하자고, 사랑해달라는 보들이의 에타는 마음이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는 내내 내 마음을 소녀처럼 설레게 했다. 


겨울이 깊어가자 보들이도 강아지 테를 벗었다. 

 보들이라기엔 어른스런 테다. 그래도 그 이름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등을 어루만지며 떠오른 무난한 이름이니 그냥 부르기로 했다. 어차피 나만 알고 부르는 이름이니까. 무작정 달려들던 어린 때완 달리 이젠 가만히 멈춰 서서 나와 눈을 맞춘다. 이 때 엉덩이 끝에 부슬한 꼬리는 처음에 두어번은 천천히 이후에는 빠르게 얄랑거린다. 그러곤 나와 눈맞춤이 끝나고 내가 자기 곁으로 온다는 확신이 들면 이러저리 서둘러 맴돈다. 이내 뛰쳐 오를 요량으로 상체를 바짝 낮춘 채 최종의 순간을 위해 집중한다. 내가 드디어 다가서면, 펄쩍 뛰어올라 내 코트자락이나 손을 물려고 달려든다. 몸집의 무게감이 가중돼 내가 뒤로 물러날 정도다. 보들이가 물었다 놓은 모직코트가 헤지기까지 했다. 손을 무는 데 아프다. 



녀석에게 손도 옷도 내맡길 수 없을 정도로 한 마리의 개로 자라있었다.  

나는 그저 등이나 턱을 쓰다듬으려는데 녀석은 계속 손이든 옷자락이든 물려고만 했다. 한 걸음 물러서 보기만하면 녀석은 아쉬워하면서도 서러운 시선으로 나를 보며 계속 몸부림을 쳤다. 왜 나를 거부하느냐, 우리의 애정이 이랬느냐, 다른 남자가 생겼냐며 항변하는 사내의 질투처럼, 녀석은 섭섭해 하는 게 역력하다. 체념할 때는 마루 밑으로 기어들어가 웅크리고 앉곤 했다. 응달지고 어두운 마루 밑은 보들이가 시무룩할 때 찾는 은신처다. 몸집도 커지고 이빨도 세지고 행동도 사나워진 보들이가 마루 밑에서 기운없이 쳐다봐도 그냥 내 방으로 등을 보이고 돌아온 적도 있다.  


보들이는 친구라곤 없는 호수 마을에서 언제나 나를 향해 반기는 온기를 지닌 생명체였다. 

나에겐 유일한 동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보들이는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고 반긴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좀 충격이었다. 나만 좋아한 게 아니었다. 보들이는 사람이 지나가면 나에게 하듯이 애정을 구하고 받았다.  나도 그런 장면을 목격한 날에는 좀 시무룩해졌다.  


어느 날, 보들이에게 장갑을 뺏겼다. 

처음엔 장난이겠거니 웃으며 달라고 하다가 손이 시려와 필요해서 애원했다. 그래도 녀석은 이리저리 날뛰거나 마루 안으로 깊숙이 숨었다 나왔다하면서도 날카로운 이빨로 장갑을 꽉 문 채 절대 놓치 않았다. 어쩌다 입에서 놓치기도 했지만 두어번을, 나보다 더 잽싸게 다시 입에 물고 돌아서버렸다. 내 손이 가까이 가면 입을 벌려 길고 탄탄해진 이빨을 내보이며 협박을 하는 것이다. 물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보들이는 더욱 맹렬히 장갑 사수에 날뛰었다. 사료가 듬뿍 든 밥그릇이 짱그랑당당다앙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엎질러졌다. 그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 



보들이는 장갑을 입에 문 채 마루 밑으로 숨어들어가 버렸다. 

내 손이 못 미치는 줄 알고 그러는 것이었다. 그래놓고도 행여나 내가 장갑을 가져갈까봐 앞발로 누르고는 태연스럽게 딴 데를 보는 척하면서 눈동자를 가장자리로 보내 내 동태를 흘기는 폼이 안 주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게 분명했다. 사태는 역전되어 이제는 내가 보들이 장갑을 강탈하려는 상황이었다. 보들이는 나를 도둑 취급했다. 보들이가 세운 작전인지도 모른다.  내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한 손에만 장갑을 낀 채였다.  


다음 날, 호수산책을 하러 가는 길에 보풀이 풀린 장갑 하나도 코트 주머니 안에 잘 챙겼다. 

2월로 접어들자 날은 제법 포근해졌건만 호수는 여전히 얼어있었다. 낮은 산자락에 낙엽이 호수에 밀려다니다가 얼음 속에 갇혀버렸다. 가을을 봉인하는 호수만의 기술이다. 낙엽을 저리 얼음 속에 가둔 건 호수의 장난일지도 모른다.  호수 한가운데 얼음이 녹은 곳, 청둥오리들은 저녁에 분주히 밤이 되기 전에 할 일이 많다는 듯이 길고 짧은 울음을 울며 몰려다녔다. 오늘따라 호수 위 저녁 하늘마저 구름이 한바탕 붓질을 한 듯 가로로 구름선이 호수 위를 꾸며놓았다. 저녁 하늘마저 얼어버린 것 같았다. 호수 수면도 얼음의 모양이나 선이 뚜렷했다. 다시 호수를 돌아 나올 때 나는 내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쩌억 쩍, 쩌져져억....돌아서는 나를 향한 호수의 인사처럼 얼음이 녹는지 얼음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깐 사이 놀람과 반가움에 미소했다. 작별인사일까.  나는 호수와 더욱 친해진 것만 같아 흐뭇하게 민박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보들이를 만날 차례다.    


보들이의 밥그릇 물그릇도 없었다. 

자리가 말끔하게 치워져있었다. 보들이를 돌보던 민박집 문을 두드려 물어보려다 발길을 돌렸다. 며칠 후면 나도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보들이는 작별을 예감했던 걸까. 자신이 떠난다는 걸. 나도 떠날 거라는 걸. 그래서 그토록 맹렬히 달려들어 기어이 내 장갑을 가져간 걸까. 보들이 이빨에 손가락 끝 보풀이 풀린 장갑은 서울로 도로 가져왔다. 아직 가지고 있다. 호수 곁에서 보낸 180일 동안 유일한 친구였던 보들이와 내가 하나씩 나눠 가진 우정의 징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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