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수로 떠난 여자 12편.
지금, 한 편의 영화이야기부터 하려 한다.
<The prize winner of defiance, ohio>, 우리나라 제목으로 <프라이즈 위너> 다.
영화 배경은 1956년 미국, 오하이오 주. 무능한 남편과 아홉 명의 자식을 감당하는 에블린이란 여자가 살고 있다. 젊은 시절 촉망받던 기자였던 에블린, 음악을 사랑하는 가수, 켈리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은 켈리는 일용노동자로 일하며 그마저도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열패감을 에블린에게 해소한다. 딸조차 켈리가 술을 끊으면 먹을 게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하자. “때때로 그가 쓸모없고 이기적이고 형편없다 생각할 때면 그가 잃어버린 목소리를 생각” 한다며 에블린은 남편을 이해하려 애쓴다.
아홉명의 자식을 먹이기 위해 에블린은 남편을 원망할 겨를도 없이 각종 글쓰기, 광고카피 공모전에 응모해 아이들의 자전거, 냉장고 같은 경품을 타내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날 남편 켈리 때문에 우유를 바닥에 엎질러 못 먹게 될 때도 우는 딸들을 보며 에블린은 생각한다. “쏟은 우유는 다시 담을 수 없어요. 바닥에 퍼져 버리니까...하지만 눈물 짓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죠. 항상 내일이면 더 많은 우유가 있으니까. ”
보다 못한 딸, 터프가 묻는다.
“아빠랑 결혼을 안 했으면 하고 바라신 적은 없으세요...엄만 도시에서 신문 기사를 쓰면서 살 수 있었잖아요. 흥미로운 인생을 사는 거요..내가 엄마였으면 화가 났을 거예요...엄마도 인간일 뿐이예요.”
에블린의 대답은 뭘까.
에블린의 글재주로 겨우겨우 먹고 살던 어느 날, 에블린 몰래 돈을 대출한 켈리 때문에 살던 집마저 은행에 넘어갈 처지가 되자, 에블린도 슬픔에 젖는다. 그러다 옷장 안을 열어보고 놀란다. 어린 아이 셋이 어깨를 맞대고 끼여 앉아 있는 것,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 묻자, 아이가 대답한다.
“엄마가 큰 상을 타시길 기도하고 있어요.”
에블린은 방해하지 않겠다며 옷장 문을 닫자 다시 세 아이는 소리 내어 기도를 계속한다.
대망의 닥터 페퍼(음료수 광고 카피) 최종 선발자 인터뷰를 하게 되지만 당선 소식은 오지 않고 집을 내주어야 하는 날이 다가오던 슬픔의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온다. 포드 머스탱 한 대, 론진 시계 두 개, 그리고 3,440,64달러의 현금을 수상하게 된다. 에블린의 작품은 250,0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닥터 페퍼 광고 문구로 채택이 된다. 이로써 집을 지키게 된다. 아마도 옷장에 모여 앉아 기도를 한 아이들의 덕도 본 것 같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귀여웠을까. 하지만 반항적인 딸, 터프는 울고, 다시 불행이 올 거라고 슬퍼하자 에블린이 달랜다.
딸, 터프에게 엄마, 에블린이 해 준 말은, 인생에 불행이 닥쳐올 때마다 에블린이 자신에게 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작가가 된 터프가 엄마의 글을 쓰던 용지가 걸린 타자기를 보듬으며 영화는 끝난다. 실화가 바탕인 이 영화는 영화 말미에 에블린의 장레식에 모인 자녀들을 보여준다.
오기와 오류, 추문으로 가득한 내 초고를 볼 때마다 기자를 포기하고 구남매 엄마가 된 경품의 여왕, 글 쓸 책상이나 타자기 없이도 집과 가족을 지킨 미국 오하이오주 에블린을 떠올린다. 그리고 안동포를 짜던 한 여자도 떠올린다. 팔남매를 혼자 키운 우리 엄마 이야기다.
마흔셋에 과부가 된 엄마는 농사로도 모자라 안동포를 짰다.
낮엔 농사를 짓고 밤엔 베틀위에 앉아 탈그락 탁탁 탈그락 탁탁 바디질을 했다. 나무로 된 베틀위에서 앉아 두 손과 발을 움직여 베를 짜는 일은 당연히 고됐다. 낮엔 밭에 엎드려 일을 했고 밤엔 베틀 위에 엎드려 베를 짰다. 실날같은 한 올 한 올을 교차하게 짜야했고 한 올이라도 끊어지면 수백개의 올 중에 끊어진 걸 찾아서 이어야했다. 끊어진 올을 이을때는 짤 때보다 더 많은 정성과 침착성이 필요했다. 그런 날이 가면, 견디면, 한 오라기 실에 불과했던 것이 30자 긴 옷감이 되어야 베틀에서 내려와 얼마간 쉴 수 있었다.
지리멸렬한 베틀위에서 작업, 그 베틀위에서 엄마는 준마를 탄 장군처럼 늠름하고 유연했다.
겨울밤, 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돌아오면 골목 끝 한옥집 문살로 베틀위에 앉은 엄마의 실루엣이 수묵화처럼 선명했다. 닥쳐 온 생애 앞에 인내와 성실이 짜 낸 옷감, 한 올의 실이 옷감이 되는 것은 한 글자 한 글자가 한 편의 글이 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쓰는가.
남편이나 자식과 관련된 일도, 도시든 호수에 있든 상관없다.
이건 순전히 지금, 여기, 나의 일이다. 자식이 셋인 나는 그토록 벗어나고픈 엄마라는 이름으로 쓴다. 나 역시 한 남자를 만났고 사랑했고 결혼했다. 그렇게 나는 애인에서 아내로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 것은 지긋지긋한 일이었고 세 번의 출산은 각기 다른 고통이었지만 내 사랑의 결실이었다. 나는 세 아이들을 존경한다. 아낀다. 어쩌면 진실로 사랑하는 것은 고통과 함께 오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선택한 인생, 자신의 현실을 얼마나 정성스럽게 가꿔가는가는, 내 집 마당에 정원을 어떻게 가꾸느냐보다 험난하고 아름답다. 어떤 선택을 했든 그건 나였다. 자신의 한계를 수시로 위협하는 출산과 육아와 생계...그 전장같은 삶 속에서 온전히 삶의 주인이 되었던 여자들이 내 글쓰기를 계속하게 한다. 나의 글쓰기는 제 몸을 바쳐 생명을 탄생시킨 후 기르고 키우는 위대한 ‘엄마’들에게 배운다.
<오늘의 필사>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것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재능이 나를 버린 게 아니다. 할말만 있다면, 설령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유지시켜 줄 지식이 고갈되면서 기아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될 뿐이다. 가지고 있는 재능이 제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무식한 사람이 글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재능은 사실에 대한 지식과 아이디어들에 자극받아야 한다. 연구하라. 재능에 영양을 공급하라. 연구조사는 상투성과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길일 뿐만 아니라 작가의 공포와 그것의 사촌인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는가, 117쪽 중에서,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 이승민 옮김./ 민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