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말고 꼭 동행이랑
제주도 일년살이를 계획했던 건. 걷는데 이골이 난 터라 올레길과 오름을 걷고자 함이었어요.
할 줄 아는 운동이라곤 오로지 걷기밖에 없으니 어찌 보면 제주에 최적화된 사람이기에.
2021년 11월 첫날, 서귀포 일호광장 앞동네로 이주를 했답니다.
여러 관광명소를 품고 있는 서귀포라 기대감에 부풀어 매일 쏘다녔지요.
그 도중에 눈에 띈 현수막, 지금은 대형건물이 들어선 자리이나 당시는 공터 철망에 걸려있었어요.
어머니를 찾습니다, 란 굵은 글씨를 보고 내용을 살펴보았는데요.
60대 여성이 홀로 올레길을 걷다가 망장포에서 마지막 흔적이 CC TV에 찍힌 뒤 사라졌다는 것.
잠수부와 헬기를 동원해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어떤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네요.
실종사건은 오리무중인 채 미제로 남게 되었으며 현수막은 해를 넘기고도 오래도록 그대로였어요.
세간의 화제였던 그 일로 한동안 제주올레 본부는 적잖은 타격을 입었을 터.
근자 들은 얘기로는 일본 해역에서 신원이 확인됐으며 평소 그녀는 저혈압에다 우울증세가 있었다고 해요. 올레 1코스부터 걸어봐요
처음 계획과는 달리 그 생각이 떠올라 은연중 올레길을 기피하게 되었지요.
원래 정형화된 룰에 얽매이거나 틀에 박힌 코스를 걷는다는 게 성향에도 그다지 맞지 않았지만요.
한 달여 스페인 산티아고를 걸으며 알베르게에 묵기 위해서라도 크레덴시알에 꼬박꼬박 세요를 찍었어요.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 완주 인증서를 받았으나 지금은 그 종이가 어디 끼어있는지도 모른답니다.
올레길 역시 1코스부터 차근차근 섭렵할 마음은 애당초 없었기에 발길 닿는 대로 들쑥날쑥 걸은 올레길.
그러한데 금번 서귀포시청 서포터스 지원서를 막판에 접수하며 화급하게 써넣은 활동계획서는 이러했어요.
'서귀포 관내 올레길 차례로 걷기'라고 썼으니 약속을 실행할 밖에.
물론 홍보만을 위한 과장된 겉치레, 나아가 자상한 올레길 안내서를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나온 올레본부 홍보물만큼 정확한 안내서도 없는 데다가요.
그 외에도 여타 블로거들이 스탬프 찍는 장소를 비롯 교통편 등 세세한 정보를 깨알같이 써놓았으니까요.
느낀 바 가감없이 현장 상황을 솔직담백하게 전하되, 판단이나 취사선택은 결국 여행자 각자의 몫이거든요.
마침 시흥리가 서귀포시 성산읍에 해당되기에 시흥초등학교에서 시작하는 제1코스로 향했습니다.
겨울날씨가 늘 그렇듯 변화무쌍, 맑았다 흐렸다 온갖 요사를 다 부렸지요.
게다가 바람도 몹시 거칠었답니다.
큰 길가에 올레길 간세가 일출사라는 절 표지석과 나란히 서있었고 뒤편으로는 길쭘한 오름이 보였어요.
밭담 안에서 당근을 캐고 있는 농지를 지나자 모던한 유리집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제주 올레 1코스 사무실인 여행자센터였습니다.
센터 옆 두산봉 오르는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젊은 남녀가 내려오면서 길을 비켜줬지요.
올레객 차림이라기보다 등산화 차림을 한 초로의 남성이 뒤따라 올라왔어요.
비교적 점잖은 인상이라 거리낌 없이 인사를 나눴지요.
두산봉은 처음이신가요? 그가 물었어요.
네, 했더니 동행 없이 여길 혼자 오셨어요? 약간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러지 뭡니까.
왜요? 혼자 걷기 후미진 곳이라도 있나요?
초창기에 올레길 사고가 험하게 났던 곳이 바로 여긴데.... 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오르더군요.
뭐 이런 얄궂은 시추에이션이 다 있담, 음산한 공포영화 찍자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올레길에 트라우마가 있는데 하필이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래전 그 사건을 들먹이다니.
사건이 종달리 어디에선가 발생했다고 들었는데 바로 이 오름이 현장이었다는 말에 와락 솟는 소름.
무섬증이 엄습, 중도 작폐하고 내려가려던 중 한 팀인 듯한 여성 여럿이 몰려왔어요.
1코스 걷는 중인가를 물었더니 그렇다기에 그들과 합류했지요.
말미오름 정상에서 잠시 환담 나누며 기분 환기시켰지만 전망이고 뭐고 좋은 줄도 모르겠더라고요.
사진 몇 장 찍고는 아예 폰도 접어 넣어버렸지요.
그 언저리 모두가 영 찜찜해 사실 사진에 풍경 담아두기도 내키지 않았으니까요.
완만한 숲길이 나오다 평평한 언덕으로 이어진 알오름 정상에서 그들은 쉬어가겠다더군요.
먼저 간다며 달리다시피 뛰어내려왔는데 개미지옥에 빠진 듯 산을 벗어나기가 더디기만 하였지요.
그만큼 능선이 긴 오름도 달리 없겠다 싶었답니다.
무슨 산이 귀곡산장도 아니건만 산담은 어이해 또 그리도 흔하던지요.
마라토너처럼 헉헉거리며 이윽고 차도 있는 데까지 왔으나 여전히 적막강산에 인적도 없었지요.
다만 어딘가 먼 데서 낮닭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아득함이 더 겁나더라니까요.
그나마 게서부터 총총 매단 올레길 표식이 자주 보이더군요.
빨갛고 파란 리본만 좇으며 무작정 전진했습니다.
종달리 표지석이 우뚝 선 삼거리에 이르자 비로소 씽씽 달리는 차량들과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마을회관과 소금밭을 찾기 위해 옹기종기 이마 맞댄 고샅길로 접어들었지요.
집 앞에 붙은 주소지가 종달논길이라 돼있어서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의외로 인근에서 논농사를 지었다네요.
한국전쟁 이후에 부족한 식량정책을 보완하고자 바다에 방조제를 쌓는 간척사업을 여기서도 펼쳤더랍니다.
이후 쌀시장이 개방되며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논밭은 택지와 갈대 무성한 유휴지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세월 따라 정부시책도 현실에 맞게 변경될 수밖에 없는 일이지요.
간척지는 종종 염전으로도 사용되는 터라 그래서 소금밭이 있는가 보다 여겼는데요.
막상 소금밭터에 가보니 서해안 염전들과는 달리 가마솥에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귀태어린 퐁낭이 서있는 소금밭 지나 다소 황량한 길 하염없이 걸어 중간 지점인 목화휴게소에 닿았지요.
바당을 끼고 걷는 길이라 밋밋하진 않았더랍니다.
바다 건너로 지미봉이 보이고 동쪽바다에는 우도가 떠있으며 저만치 성산일출봉도 드러났고요.
정겨운 해변에는 파래 같은 해초가 좍 깔려 있었고 얕은 바다에는 동동 물새들이 노닐었지요.
작은 어촌 건너편으로는 시흥마을 수호신인 영등 하르방 석상이 소년 같은 표정으로 서있었답니다.
이 마을 출신인 호국영웅 강승우 육군 중위를 기리는 화강암 기념비도 훌륭했어요.
허기가 져 근처 올레길해녀의집에 들러 전복뚝배기 한 그릇 비웠는데요.
시장기 때우려고 먹긴 먹었지만 성의없이 설핏 끓여낸 음식맛이더라고요.
식당에서 나오니 슬슬 해가 설핏해지기 시작하더군요.
마음이 급해 오소포 연대에 잠시 올랐다가 내려와 해맞이해안길을 따라 다시 하염없이 걸었지요.
낯익은 오조리 해뜨는 집에 이르렀을 때는 서녘에 저녁놀이 지고 있었어요
빠르게 성산갑문을 지나는데 어둑신한 물가에서 새 한마리가 먹이를 낚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대면 어류들도 다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소득이 없으면 그 새는 저녁을 굶지나 않을지.
하지만 새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지요.
바로 보이는 빤한 길이지만 광치기해변까지는 거리가 한참 떴으니까요.
그러나 올레길 걷기며 카미노길 걷기는 모두 스스로가 자청한 고행길.
고행자처럼 걷고 또 걸어 일출봉 마주 보는 수마포를 지났습니다.
4·3 당시 4백 명의 학살터였던 터진목에 이르자 그만 먹먹해졌지요.
당시 아버지를 잃은 한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 누구의 잘못이냐고 캐어묻는 것도, 누구의 책임이라고 탓하는 것도, 배상 보상문제를 논하는 것마저도
용서와 화해 앞에서는 더 이상 진리일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의연한 모습이
그 일로 구겨지거나 추해지는 일은 없어야 하겠기에 그러합니다.
화해와 상생의 의미가 잘못 정의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얼마간의 보상, 선대의 그 목숨값보다는 시인은 원했지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노릇하면서 도리에 맞게 살아 훗날 부끄럽지 않은 후손 되기를.
바로 지척인 광치기해변이야 한달음에 닿을 수 있는 곳.
파도소리 가득한 광치기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올레 표식 위로 밤기운이 푸르스름하게 스며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