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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리라도 하니? 백서향나무야.

by 무량화 Mar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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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만 삼 년 넘게 살다 보니 언제 어디로 가야 제철 꽃을 볼 수 있는지 뇌리에 꽃 달력이 담겨 있다.


백서향 개화기라 도립곶자왈이 생각났다.

숲 전체에 스며든 향기 고혹적인 그곳 정취가 아삼삼하게 어른거렸다.


먼저 곶자왈 안내센터로 백서향 개화 상태를 전화로 물어봤다.


백서향이 피기 시작했다는 말에 주저 없이 도립 곶자왈로 방향을 잡았다.

서귀포 시내에서 가기엔 상그러운 위치라 차를 두 번 갈아 타야 닿을 수 있는 지역이다.


차에서 내려 여유로이 영어도시를 둘러봤다.


동북아시아 교육의 허브를 지향하며 무엇보다 해외유학 증가로 인한 외화유출 문제, 기러기 가족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추진한 국가 핵심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 구억리, 신평리에 위치했으며 곶자왈지대인 일대 379만㎡[약 115만 평]에 2010년 타운이 조성됐다.


곶자왈을 걷다가 든 생각이지만, 대부분 외지에서 온 학생들이라 보호자가 딸려있을 텐데 특히 조부모가 가디언인 경우 이곳이야말로 그분들 건강을 위해서는 최적의 환경이 아닐까 싶었다.


현재 총 네 곳의 국제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국제학교 재학생의 3분의 1 이상이 인천송도 국제학교와 마찬가지로 강남 3구 출신으로 알려졌다.


Global Education City 답게 도로변 간판들은 영어, 거지반 외국 명문대학 진학을 위한 예능계 학원들이었다.



영어도시와 지척거리인 도립곶자왈 입구에 들어서자 향기가 은은히 번지는 거 같았다.

우리는 그럼 그렇지! 아암~ 추임새까지 넣으며 바삐 테우리 숲길로 들어섰다.


당연히 기대했던 백서향 꽃은 그러나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낯익은 유선형 윤기 나는 잎새를 단, 나지막한 나무는 분명 백서향나무 맞는데 가지 끝엔 꽃눈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데크를 따라 밀림 같은 숲길 한동안 걸었지만 얼크러 설크러진 나무들만 보일 뿐, 꽃내음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곶자왈 자체가 음산하니 괴괴한 분위기라 비밀스런 마법의 향불이라도 피운 듯 기이한데.

곶자왈 초입에서 후각을 자극하던 그 향기는 대체 뭐였단 말인가.

아기를 간절히 원하던 여인이 상상임신을 하듯 환각 같은 찰나의 도취였나.

혼자였다면 곱다시 착각으로 돌리겠으나 동행한 황선생도 꽃내음에 기분 한껏 고양됐었거늘.

테우리 길을 지나 방향을 잡은 한수기 길은 거의 원시림과 흡사했다.

갈수록 곶자왈 특유의 거친 길만 이어졌다.

계절 헷갈리게 하는 아열대성 상록수가 하늘을 가려 어둠침침 그늘 짙은 숲.

습습한 바닥은 미끄러웠고 화산석은 울퉁불퉁한 데다 돌출된 나무뿌리 몹시 걸리적거렸다.

들끓던 마그마가 식은 용암 협곡도 만났고 제주에 숨을 불어넣는 허파라는 숨골도 지나쳤으며 4.3 유적지도 스쳤다.


상수리나무 이파리를 똑 닮았는데 밤나무로 상록 활엽교목이며 난대식물인 구실잣밤나무잎의 전면과 후면


발치만 보고 걸었다.

노면이 험해 자칫 넘어지기 쉬운 길이기도 한 데다 양옆의 키 작은 나무들을 눈여겨보기 위함이었다.

그땐 인근에 퍼져있는 향기로 백서향 꽃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번엔 눅눅한 숲이끼 내음만 번졌다.

해거리를 하나? 예년에 워낙 꽃이 풍성하게도 핀 데다 꽃숭리 소담하더니만.

그래도 어쩌다 한 두 송이라도 으려나 하면서 유심히 숲을 살폈다.

한 시간여 길 따라 이리저리 미로 헤매듯 걷던 숲에서 나오니 빌레길 끝자락.


드디어 작디작은 꽃이라 희끄무레하긴 하나 백서향 꽃을 겨우 만났다.

아, 여기 꽃이 폈네!

우린 반가움으로 동시에 큰 소리로 외쳤다.

여리여리 가냘프고도 자그마한 나무의 외줄기 끄트머리에 살푼, 별같이 돋아난 꽃.

거기서부터 드문드문이나마 백서향 꽃은 피어 있었다.

보물찾기 하듯 어렵사리 조우한 꽃, 그러나 향은 아주 미미했다.

언덕에서 기다리는 전망대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낮게 엎딘 오름들을 헤어보았다.

바람 사정없이 몰아치는 전망대를 뒤로하고 출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쪽에도 그리 많이 피었던 백서향이건만 전혀 꽃은 만나볼 수 없었다.

한수기 길과 오찬이 길에서 헛걸음했을지라도 그나마 본 것에 감사하기로 하고 귀로에 올랐다.


63644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에듀시티로 178 제주곶자왈도립공원   

Tel: 064-792-6047

제주곶자왈도립공원은 연중무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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